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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헤일메리’ 라이언 고슬링 따라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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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너무 오래 미뤘다.
3월 즈음 되면 신년에 세웠던 목표들이 하나둘 가물가물해진다. 운동과 독서는 자기계발계의 단골손님들이다. 새해를 맞이해 러닝화를 새로 사고, 전자책 서비스 구독을 연장했다. 올해는 진짜 다르다고 다짐까지 해준다. 어차피 실행은 미래의 내가 할거다.
1월의 자신이 떠넘긴 목표를 받아든 3월의 나. 러닝화에는 먼지가 쌓이고, 모바일 스크린에는 푸시 알람이 쌓인다. 아, 어디서 본 장면이다. 이 뻔한 신년 드라마 클리셰를 한 번쯤 비틀어줄 때가 됐다. 매년 반복되는 이 패턴, 해결사는 납작한 13L짜리 가방이었다.
가방의 실루엣, 작고 가볍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정신이 바쁜 현대인에게 달리기는 최고의 도피처다. 몸이 바빠지면 잡생각이 자리 잡을 틈이 없다. 발 구름, 팔 치기, 호흡이 만들어내는 리듬이 머릿속 소음을 밀어낸다. 매 호흡이 새롭게 느껴진다. “들숨에 사랑을, 날숨에 평화”이라는 요가 격언이 떠오른다. 나는 평화처럼 멋진 걸 내쉬지는 못하고, 보통은 내 안에 쌓이는 생각이나 감정들을 뱉는 편이다. 그렇게 달리면서 한껏 비워내고 나면 무엇이든 다시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기세가 생긴다.
옥수역 인근 달맞이 근린 공원에서 내려다 본 한강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문제가 찾아온 것은 달리고 난 뒤였다. 숨을 돌릴 겸 카페에 도착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다. 호흡을 가다듬는 것도 잠시, 손이 주머니로 간다.
스마트폰을 꺼내 든다. 인스타그램 릴스를 넘기고, 유튜브 알고리즘을 훑는다. 작은 화면 안에서 시선을 끌어당기기 위한 경기가 펼쳐진다. 자극적인 썸네일과 빠른 컷편집은 내 시선을 무의식 차원에서 끌어당긴다. 30분이 증발한다. 달려서 얻은 상쾌함이 손가락 운동 몇 번에 날아간 듯하다. 애써 비워낸 내면의 소리가 캡컷 AI 더빙으로 가득 찬다.
앉자마자 나가기엔 커피값이 아깝고, 스마트폰을 안 보자니 딱히 할 게 없어 영 뻘쭘하다. 반복 숙달된 손가락은 자꾸만 스마트폰으로 향한다. 맞은 편에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아, 차라리 이 시간에 못 읽었던 책을 한 권 들고 왔다면 어땠을까.
사실 방법은 간단하다. 책과 함께 뛰면 된다. 문제는 가방이다. 일반 백팩을 메고 달리면 책이 가방 안에서 춤을 추고, 발을 구를 때마다 등판을 두드린다. 아마도 영화관 뒷자리에서 느껴지는 발놀림 같은 불쾌한 두드림이 내 몰입을 방해할 것이다. 그러니 가방은 책이 흔들리지 않도록 몸에 밀착되어야 한다.
구석에서 발견한 사이클 가방. 13L 기준 책 한 권, 노트 한 권, 갈아입을 롱슬리브 한 장이 여유있게 들어간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며칠 뒤, 옷장 한구석에서 적당한 가방을 발견했다. 가볍고 납작해서 몸에 착 붙는 녀석. 나중에 알고 보니 사이클 가방이었다. 이름이야 아무렴 어떠한가. 등산할 때 메면 하이킹 가방, 달릴 때 메면 러닝 가방, 산을 달리면 트레일러닝 가방이 되는 거다.
오늘은 러닝 가방으로 정했다. 책 한 권, 수첩 한 권, 갈아입을 티셔츠가 정확히 들어간다. 허리와 가슴 스트랩을 바짝 당기니 기분 좋은 텐션이 전해진다. 어깨가 펴지는 것이 자세교정 밴드가 따로 없다. 거울을 보니 뭔가 고수가 된 기분이다. 10㎞ 이상은 좀처럼 달리지 않는 패션 러너로서 아주 흡족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카페에 도착했다. 여느 때처럼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나는 이 루틴이 된다는 걸 직감했다. ‘이 짐짝을 등에 메고 5㎞를 뛰어왔다'는 사실이 책을 펼칠 강력한 명분을 만들기 때문이다. 짐꾼을 자처한 나의 보상 심리를 자극하는 지독한 구조의 웰니스 전략이다. 그러니 평소에 읽고 싶었지만 미뤄둔 책이 있다면 꼭 해보시라. 단, 총균쇠나 사피엔스 같은 벽돌 책은 관절건강을 위해 넣어두기를 권장한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책을 펼치니 스스로 좀 있어 보이는 기분이 든다. 허세라고 해도 상관없다. 허세가 독서를 가능하게 만든다면, 지적 허영심마저 적극적으로 동원하자. 목표는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충만한 시간이다. 몰입을 위한 팁을 하나 공유하자면, 형광펜이나 밑줄용 펜을 챙기는 것이다.
휴대폰으로 향하는 나의 손을 전담마크 할 샤프와 형광펜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펜 한 자루라도 손에 쥐고 있으면 읽기의 밀도가 달라진다. 눈으로 훑는 독서와 필압을 느끼며 몸으로 참여하는 독서는 몰입감이 다르다. 형광펜으로 하이라이트를 표시하면 더 좋다. 릴스대신 눈부신 형광색이 당신의 시선을 끌어당길 것이다. 스마트폰은 달리면서 음악이나 팟캐스트를 듣는 용도 외에는 잠시 넣어두자. 스크린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하기 바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얼음이 녹아 아메리카노가 밍밍해졌다. 책을 덮고 가방을 멘다. 버클을 채우고 스트랩을 조이니 다시 익숙한 텐션이 돌아온다. 카페 문을 열고 나선다. 지난번과는 여운이 다르다. 디지털 피로감으로부터 벗어난 산뜻함이 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하루는 역시 기분이 좋다.
다음 주에는 어떤 책을 담고, 어떤 카페를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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