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ESA DI SAN LORENZO in VENICE, ITALY ⓒ Marco Cappelletti / TBA21-Academy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다녀온 선배는 자꾸 그곳에서 본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대화 주제에서 약간의 연결점만 주어지면. 때로는 약간의 비약까지 불사하면서. 그리고 거기에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십중팔구 미술 작품 자체보다 해당 작품이 걸렸던 건물, 방, 벽면에 주목하고 있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크고 작은 행사가 열렸던 온갖 빌라, 팔라초, 바실리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는 뜻이다. 사실 동 시기에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다녀온 바, 그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열리는 행사 역시 대다수가 오래된 빌라, 팔라초, 바실리카를 무대로 하니까. 이탈리아, 특히 이탈리아 북부에는 오래된 건축물이 정말 많다. 기원전부터 시작되었던 이탈리아의 대저택 문화는 봉건제 아래의 영주들, 부유한 상인들을 만나며 꽃을 피웠고 다양한 시기에 지어진 온갖 호화로운 건축물을 남겼다. 베니스나 밀라노 같은 역사적 대도시에서는 특히나 그랬다. 그리고 오늘날 해당 도시들은 이 건축물들을 보존하고 재건해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 국제적 행사의 이벤트홀도 그 용도 중 하나다. 이런 행사에 초청된 방문객들은 우선 장소가 가진 오라에 압도되고, 행사의 내용을 감상한 후엔 공간과 행사 내용이 맞붙고 떨어지는 지점을 천천히 곱씹게 된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미술 행사 중 하나인 베니스 비엔날레는 그 안에 모이는 작품들과 기획이 품은 함의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행사. 만약 그곳에 직접 다녀온 기자가 전시 장소에 대한 묘사는 과감히 생략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분명 마음에 오랜 잔상으로 남았을 테다.
마르코 폴로의 마지막 안식처로 유명한 베니스의 키에사 디 산 로렌초, 혹은 ‘오션 스페이스’가 그 감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예가 될 것 같다. 이 기사의 첫머리에 실린 이미지 속 공간. 16세기 말에 지어진 이 성당은 지난 수백 년 동안 나폴레옹 전쟁의 피해, 정치적 변화로 인한 내부 철거, 발굴 작업을 위한 폐쇄 등 온갖 사건을 겪었고, TBA21-아카데미의 주관으로 2016년에 이르러서야 복원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로 2020년부터 전시, 연구 및 공공 프로그램을 위한 센터인 오션 스페이스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성당 터가 행사 공간으로 활용된 건 유래가 좀 더 오래다. 특히 1984년에 일환 행사인 국제 현대음악 페스티벌의 행사장으로 쓰인 이래로 꾸준히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올해 이 공간을 채운 것은 복합 전시 <Re-Stor(y)ing Oceania>. 최근 아르테스 문디 미술상을 받기도 한 파푸아뉴기니 부겐빌 출신 아티스트 탈로이 하비니가 기획하고 통가 출신 아티스트 라타이 타우모에포와 뉴질랜드 마오리족 후예인 엘리사페타 히네모아 헤타에게 작업을 요청해 연 전시였다. 이들은 식민지배부터 자원 착취 그리고 앞으로 끊임없이 확장될 기후변화의 피해까지 끊임없이 억압받고 있는 오세아니아 섬나라들의 역사를 되짚으며, 설치미술, 노래, 공연, 웅변 등 다양한 형태로 이를 전복하고자 했다. 해당 전시가 오션 스페이스이라는 이 다중적 역사성을 가진 공간과 영감을 공유하며 기획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탈로이 하비니는 2021년 개인전 이후로 계속 TBA21-아카데미와 협업해오고 있으며, 그런 연결성을 차치하더라도, 일단은 해당 전시가 일반적인 무대나 전시장에서 공개되는 장면은 아무래도 잘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FONDAZIONE QUERINI STAMPALIA in VENICE, ITALY ⓒ Fondazione Querini Stampalia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의 특별전 <A Journey to the Infinite>가 열렸던 퀘리니 스탐팔리아 재단도 베니스에서 꼭 들러봐야 할 장소로 꼽힌다. 베니스 비엔날레 동안에는 물론, 해당 기간이 아닐 때에도. 16세기 초에 지어진 이 건축물은 베니스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 중 하나였던 퀘리니 가문의 저택으로 사용되다 19세기에 재단 시설로 변경된 후 현재까지 미술관, 도서관, 기록보관소 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지어진 지 500년가량 지난 건물인 만큼 몇 차례의 재단장 과정을 거쳤는데,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1959년에 그 첫 단추를 꿴 이가 카를로 스카파라는 점이다. 베니스 출신의 이 위대한 건축가는 도시 고유의 생활상을 간직하면서도 실용성과 현대적 터치를 가미했다. 예를 들어 베네치아의 저택들은 교역 물품을 쉽게 들이고 낼 수 있도록 저택 안까지 배가 들어오는 구조로 지었는데, 그 때문에 재단 시설이 된 이후에도 홍수 때마다 물난리가 나는 문제가 있었다. 카를로 스카파는 이 구조를 없애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턱을 높이고 바닥 구조를 개선해 수공간으로 재해석했다. 주 출입구를 새로 만들면서 낸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다리, 모더니즘과 전통적 요소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중앙 계단, 동서양의 미감이 한데 섞인 정원 역시 퀘리니 스탐팔리아 재단이나 카를로 스카파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이런 건축물이 전시 공간일 때 생기는 가장 큰 효과는, 방문자들로 하여금 작품들로 향하는 길목에서 시간 감각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눈부시게 밝고 매혹적이며 대비되는 색면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미국의 미술 전문 매체 <아트뉴스>의 표현이다) 유영국 화백의 작품들은 딱 그런 상태에서 감상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평생 산과 하늘과 태양을 탐구해온 작가인 만큼 물과 정원에 둘러싸인 공간에서라면 금상첨화일 테고 말이다.
COMPLESSO DELL'OSPEDALETTO in VENICE, ITALY ⓒ Lorenzo Palmieri / Nebula
장외 전시 <Nebula>가 열렸던 공간에 대해서도 말할 필요가 있다. 폰다지오네 인 비트윈 아트 필름이 주관한 해당 전시는 평이 극단적으로 갈렸는데, 현재 구글의 해당 전시 항목에는 별도의 코멘트 없이 별점 5점을 남긴 평 2개와 별점 2점을 준 평 하나가 달려 있다. 2점의 코멘트는 다음과 같다. “굉장히 지루한 비디오 아트. 어떤 식으로도 혁신적이지 못하다. 교회를 활용한 전시 공간은 쿨하지만.” 이 리뷰에는 공감 표시도 하나 찍혀 있다. 반면 <에스콰이어>의 필자 김실비 미술작가는 해당 전시를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전시 중 하나로 꼽았다. 물론 관건은 얼마나 즉각적인 감흥을 원하는가, 얼마나 그 속에 깃든 맥락을 읽어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일 터. 라틴어로 ‘안개’를 뜻하는 해당 전시는 많은 가치가 불투명해진 동시대를 조명하는 전시였다. 이민자의 정체성을 가진 세계 각국의 작가 10인의 영상 작업물을 통해서. 김실비 작가는 미술이 실천적 힘을 잃은 시대에 해당 전시가 “미술이 정말로 저항과 공존을 위한 장소가 될 수 있을지” 그나마 두드려보는 역할을 한다고 평가했다. 구글 리뷰가 칭찬한 ‘쿨한 전시 공간’ 역시 이 맥락에서 돌아볼 때 새로운 의미가 생긴다. 콤플레소 델 오스페달레토는 1527년 베니스 외곽 지역에 가난과 죽음의 씨앗을 뿌린 심각한 기근으로 지어진 시설이었다. 해당 센터에는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남녀노소 누구나 머물 수 있었고, 간이 시설 터에 곧 병동과 교회가 생겼다. 그리고 이제는 전시 공간이 되어 ‘짙은 안개’를 말하는 전시를 품은 것이다.
앞서 말했듯, 밀라노에도 행사 공간으로 쓰이는 역사적 건축물이 많다. 위키피디아의 설명에 따르면 밀라노는 기원전 1세기 이래로 역사 내내 빌라와 팔라초(둘 모두 대규모 저택을 의미한다)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점령하고 스스로를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시킨 배경 도시답게, 그와 연관된 역사적 건축물도 다채롭게 남았다. 밀라노 개선문, 브레라 미술관, 팔라초 세르벨로니, 시민 경기장… 올해 처음으로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행사를 가진 톰 브라운이 데뷔 무대로 택한 것은 나폴레옹과 그의 가족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쓰였던 아레나이자, 손님들을 위한 숙소로 쓰였던 건물 팔라지나 아피아니다. 톰 브라운은 프레테와의 협업 침구 컬렉션을 선보이기 위해 <…time to sleep…>이라는 이름의 쇼를 준비했는데, 사실 그 내용은 여섯 모델이 등장해 톰 브라운 슈트를 차려입고 침대에 누워 잠에 드는 게 전부였다. 1시간에 걸쳐서, 천천히, 마치 무언가의 제의처럼. 입체적인 스토리와 매력을 품은 장소를 택하고 그 공간의 속성을 잘 활용하는 것만으로도 생기는 스펙터클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몰 즈음에 맞춰 시작된 행사장 실내는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그날의 마지막 햇빛과 실내 장식의 조화로 시시각각 표정을 바꿨고, 모델이 신은 톰 브라운 구두 특유의 금속 마찰음은 초침 타이밍에 맞춰 규칙적으로 실내를 울렸다. 누구 하나 눈치 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모델들이 안대를 끼고 잠자리에 든 후에도 모두가 숨죽이고 있었던 것, 거기에도 분명 공간이 끼친 힘이 있었을 테다.
PALAZZINA APPIANI in MILAN, ITALY ⓒ Thom Browne
시작 6년 만에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구심점 중 하나로 떠오른 알코바 역시 이 주제 아래 반드시 언급해야 할 행사 중 하나다. 올해 이들이 행사를 연 장소는 밀라노 중심에서 20km쯤 떨어진 외곽 마을의 저택 빌라 보르사니와 빌라 바가티 발세키였다. 중요한 건 작년 행사가 열린 곳이 동남부의 폐쇄된 거대 도축장 엑스 마첼로였다는 점이고, 그보다 중요한 건 그 이전에는 각각 군 병원 폐허, 캐시미어 방적공장 폐허, 파운드케이크 공장 폐허에서 열렸다는 점이다. 알코바는 밀라노에 숨겨진 역사적 공간들을 찾아내 1, 2년에 한 번씩 의도적으로 장소를 바꾼다. 이유는 너스레를 조금 보태자면 ‘설립자 두 사람이 아무 목적 없이 차를 몰고 밀라노 여기저기를 배회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 좀 더 진지하게 말하면 ‘장소를 옮기지 않으면 한때 주목받았던 여느 행사들이 그렇듯 힘을 잃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매해 같은 장소에서 같은 디자이너들과 작업한다면 저는 거기서 어떤 게 나올지 미리 알게 되겠죠. 정형화되면 상업화되기 시작할 테고요.” 행사장에서 만난 알코바 대표 발렌티나 치우피가 들려준 설명이다. 사실 올해의 행사 장소인 빌라 보르사니와 빌라 바가티 발세키는 지난 알코바들과 비교하면 다소 평이한 축이었다. 앞서 말했듯 밀라노는 빌라와 팔라초의 메카이며 무수한 행사가 그런 곳에서 열리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올해 알코바가 재미없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저택 상층부 창문을 가득 채운 정체불명의 빨간 풍선, 지하실에 배치한 으스스한 분위기의 놀이공원 테마 설치물, 우아한 정원 한가운데에 자리한 미니 골프장… 매해 그랬듯, 이 행사에서는 그야말로 무엇을 만나게 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지어진 빌라를 헤집고 다니는 어느 순간에는 오래되고 방치되고 잊힌 것들에서 이렇듯 새로운 가능성이 끝없이 나오는 게 새삼 놀랍기도 했다. 발렌티나 치우피는 그것의 정체를 ‘전시 공간과 내용 사이의 대화’라고 불렀다. 그녀는 그 힘을 믿는다고 했다.
VILLA BAGATTI VALSECCHI in MILAN, ITALY ⓒ Piergiorgio Sorgetti / @alcova.mil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