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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 채경선 미술 감독이 말하는 핑크의 의미

채경선 미술감독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오징어 게임> 시즌 3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결국은 시나리오와 캐릭터에 답이 있다는 말과 함께. 캘린더에 6월 27일을 저장해놓아야 하는 이유다.

프로필 by 박호준 2025.06.27

*인터뷰는 2월 중순에 진행했다.


미국 미술감독조합상 수상 축하드립니다.<오징어 게임> 시즌 1으로 3년 전 수상한 것에 이어 두 번째네요.

정말 예상하지 못했어요. 처음 받았을 때도 ‘이게 내가 받아도 되는 상인가’ 싶은 마음에 얼떨떨했는데 같은 시리즈로 또 받을 줄 몰랐어요. 시즌 2에선 시즌 1에서 큰 사랑을 받은 공간들에 조금씩 변주를 주었는데 그 부분을 긍정적으로 봐주신 게 아닌가 싶네요. 함께 고생한 저희 미술팀과 같이 받은 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근데 솔직히 만약 상을 다시 받는다면 시즌 3로 받을 줄 알았어요.

시즌 3에 무언가 스케일이 큰 미술 장치가 있다는 뜻인가요?

노코멘트 하겠습니다.(웃음) 인터뷰가 나갈 때면 시즌 3 공개가 임박했을 테니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오징어 게임> 시즌 1과 2를 통틀어 미술적으로 만족스러운 장면을 꼽는다면요?

두 가지 장면을 꼽고 싶어요. 첫 번째는 시즌 2 6화에 등장한 짝짓기 게임이요. 둥글게 생긴 대형 원판 위에 참가자들이 올라가 있다가 정해진 인원대로 방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게임이었죠. 촬영감독님이 해당 장면을 두고 ‘살아남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세포분열을 보는 것 같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그 장면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오래 남는 건 결과물이 만족스러운 것도 있지만, 준비하면서 고생을 많이 해서 그렇기도 해요. 수십 명의 연기자가 실제로 대형 턴테이블 위에 올라갔거든요. 처음 촬영장을 공개했을 때 배우들도 스케일에 깜짝 놀라더라고요.

두 번째 장면은요?

의외일 수도 있는데 딱지남(공유)과 성기훈(이정재)이 모텔에서 러시안 룰렛을 하는 장면이요. 모텔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레드 컬러와 블루 컬러 조명을 대조적으로 사용해 인물 간의 대립을 고조시킨 대목이 인상 깊었거든요.

<오징어 게임>은 컬러를 내세운 연출이 많죠.

핑크는 짚고 넘어가고 싶은 색깔 중 하나입니다. 자세히 보면 성기훈이 딱지남과 러시안 룰렛을 할 때 핑크색 소파가 등장해요. 모텔 이름을 ‘PINK’로 한 것도 그렇고요. 일반적으로 핑크는 강한 느낌보단 여리여리하고 부드러운 색으로 쓰이는데 일부러 그걸 뒤집었어요. 언뜻 귀여워 보이는 분홍색 옷 병정들이 실은 피도 눈물도 없는 킬러라는 걸 알았을 때 느끼는 낯섦을 위해서요.

사극이나 SF와 달리 <오징어 게임>은 현실과 비현실을 끊임없이 오가는 탓에 미술적으로 균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시즌 1을 준비할 때만 해도 혹평을 받을 줄 알았어요. 돈 때문에 목숨을 버린다는 설정이나 유치해 보이는 알록달록한 비주얼이 비현실적이고 과하다고 생각할 줄 알았거든요. 처음 감독님과 미술 콘셉트를 잡을 때 게임이 벌어지는 공간의 테마를 어떻게 잡는지에 대해 많이 고민했던 이유이기도 해요. 작품이 다루는 메시지가 무겁고 잔인한 장면이 자주 등장하니 장소는 아예 비현실적인 방향으로 가기로 했고, 결과적으로 그 결정이 탁월했던 것 같아요.

게임이 벌어지는 곳 외에 미로 같은 계단 역시 전부 다시 지었다고 들었어요.

기본 골격과 페인트 컬러는 그대로 쓰되 새롭게 추가된 공간들이 있어요. 시즌 2에 보면 대규모 총격 액션신이 있잖아요. 컨트롤 타워로 향하는 뒷길도 나오고요. 이런 장면을 위해 동선을 추가했죠. 여담이지만, 공들여 지은 세트를 철거할 땐 울컥할 정도로 마음이 아파요. 마음 같아선 통째로 가져다 다른 곳에 남겨두고 싶을 정도로요. 작은 전구 2000여 개를 수작업으로 달기 위해 꼬박 한 달이 걸리기도 했으니까요. 모든 촬영장이 그랬지만 이번엔 특히 마음이 헛헛했어요.

채 감독은 촬영 전 렌더링 이미지를 구현해 조명과 앵글에 따른 변화까지 전부 고려한다.

채 감독은 촬영 전 렌더링 이미지를 구현해 조명과 앵글에 따른 변화까지 전부 고려한다.

렌즈 종류와 촬영 거리 등을 달리하면서 시즌 1보다 영희가 더 무섭고 괴상해 보이도록 표현했다.

렌즈 종류와 촬영 거리 등을 달리하면서 시즌 1보다 영희가 더 무섭고 괴상해 보이도록 표현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빙글빙글 이어지는 <오징어 게임>의 계단을 두고 스페인의 건축 작품 ‘라 무라야 로하’를 떠올리기도 해요.

저도 시안 작업을 하다 그 작품을 발견했어요. 영감을 얻기 위해 찾다 보니 초현실주의에 속하는 다양한 작품들을 알게 됐죠. 이건 저의 작업 스타일이기도 한데, 어떤 작품을 맡게 되면 벼락치기에 돌입해요. 영화<남한산성>의 미술감독을 맡았을 땐 병자호란에 대한 자료 수집과 공부를 몇 주간에 걸쳐 했죠. 흔히 말하는 ‘고증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요.

시즌 1의 엄청난 성공이 되레 부담으로 다가오진 않았나요?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강했어요. 한껏 높아진 시청자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를 준비했는데, 예를 들면 참가자들과 병정들의 의상을 다른 색으로 바꾸는 식으로요. 근데 황 감독님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하자”고 하더라고요.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이미 잘 구축해놓은 세계관을 흔들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죠. 그래서 시즌 2와 3의 비주얼적인 큰 흐름은 뒤집어엎는 게 아닌 작은 변주에 가까워요.

인스타그램을 보니 감독님이 시안 작업을 3D 모델링으로 하시더라고요.

미술감독마다 작업 방식이 다른데 저는 매사 치밀하게 계산하는 걸 좋아해요. ‘스케치업’이나 ‘엔스케이프’같이 건축 분야에서 주로 사용하는 렌더링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조명의 조도, 카메라 앵글, 렌즈 종류에 따른 차이까지 전부 시뮬레이션할 수 있거든요. 이런 작업을 통해 마감재의 컬러와 소재를 최적화할 수 있죠. 다른 팀이랑 협의할 때도 3D 이미지가 있으면 소통이 수월하고요. 이젠 이렇게 렌더링 이미지를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좀 불안해요.

미술감독으로서 기존 한국 영화와 달리 넷플릭스 콘텐츠를 만들 때 다른 점이 있나요?

제작비가 빵빵하다는 점이 아닐까요?(웃음) 다른 인터뷰에서도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앞서 언급한 대형 턴테이블 세트가 구현될 수 있었던 건 분명 넷플릭스의 적극적인 지원 덕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황동혁 감독님도 미술적인 부분에 지원을 많이 해주시는 편이고요.

OTT가 보급되면서 영화나 드라마를 소비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죠. 그게 미술감독에게도 영향을 끼치나요?

스마트폰으로 감상하면 스크린으로 보는 것보다 디테일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죠. 하지만 세트 비주얼의 퀄리티는 보는 사람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연기하는 배우에게도 영향을 주는 요소예요. 앞으로 얼마나 더 매체 환경이 달라질지 알 수 없지만, 저는 여전히 수작업을 선호할 겁니다. 시즌 2의 5인6각 게임에 등장하는 오색 트랙도 마무리 단계에서 손으로 일일이 덧칠한 거예요. 화면을 정지시켜 놓고 보아도 보일락 말락 한 디테일이지만 저는 그런 게 너무 중요해요.

티저 영상을 통해 ‘영희’가 아닌 다른 ‘철수’의 존재가 공개됐어요. 시즌 3에선 또 어떤 비주얼 쇼크를 기대해볼 수 있을까요?

시즌 1은 수직적인 공간감을 보여주는 장치가 많았고 시즌 2는 그걸 수평적으로 확장했어요. 시즌 3에선 그 두 가지가 한 점으로 모이는 최종본이 될 예정입니다. 시즌 3가 ‘진짜’예요. 작품을 찬찬히 뜯어보는 분들은 여러 미술 장치들에 숨겨놓은 상징을 찾아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Credit

  • EDITOR 박호준
  • PHOTOGRAPHER 김성룡
  • PHOTO 넷플릭스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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