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D

당신이 미처 몰랐을 미식과 와인의 도시, 시애틀

25회를 맞은 테이스트 워싱턴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발견한 건 시애틀 미식과 와인 문화의 놀라운 포용성, 그리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이었다.

프로필 by 오성윤 2025.04.29
매해 시애틀에서 열리는 테이스트 워싱턴.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단일 지역 와인 & 음식 이벤트로 올해 25주년을 맞았다.

매해 시애틀에서 열리는 테이스트 워싱턴.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단일 지역 와인 & 음식 이벤트로 올해 25주년을 맞았다.

시애틀에 도착해 처음 먹은 것은 샌드위치였다. 립아이 스테이크와 블루치즈, 비네그레트 드레싱이 어우러진 샌드위치. 다음 날 아침으로는 연어로 속을 채운 피로시키(러시아식 빵)를 먹었고, 점심으로는 항구 바로 옆 어시장에서 공수한 조갯살로 만든 클램차우더를 먹었다. 저녁으로 볼리비아 스타일의 돼지 내장 국수까지 한 그릇 비우고 났을 때는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시애틀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군.’ 시애틀은 미국 북서부, 워싱턴주의 항구도시다. 보잉과 아마존, 스타벅스의 고향이며, 록밴드 너바나가 태동을 시작했던 곳, 영화배우 이소룡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당도하기 전에 미처 몰랐던 사실, 그건 이 도시가 꽤 수준 높은 미식 도시라는 점이었다. 시애틀 시내에서 구글 맵을 켜고 주변 식당을 검색하면 아무 필터 없이도 추천 리스트는 으레 세계 음식을 망라한다. 프랑스 요리, 중국 요리, 그리스 요리, 말레이시아 요리, 아르헨티나 요리… 시애틀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게시의 말에 따르면 호텔 주변에 썩 괜찮은 모로코 음식점도 있다고 했다. 몇 년 전 에티오피아에서 이 도시로 이주해 왔다는 그는 외국인 손님에게 대뜸 맛집 정보부터 주고 싶어 했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엔 꼭 가보세요. 손님 호텔 바로 맞은편이니까요.”

사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은 시애틀을 방문한 여행자가 피해 가기 더 어려운 곳이다. 그 정체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파머스 마켓. 1907년 8명의 지역 농부가 시작했던 시장은 오늘날 500개 이상의 상점을 품은 아케이드형 다층 공간이 되었다. 온갖 농수산물 가게는 물론 꽃가게, 레스토랑, 바, 이발소, 코믹 숍, 레코드점까지 품고 있으며 해안가라는 입지를 활용해 바다가 펼쳐 보이는 근사한 산책로까지 조성되어 있다. “3월 말, 4월 초쯤 되면 발 디딜 틈이 없어요. 미국 전역에서 관광객이 몰리는 데다 페리도 일주일에 몇 번씩 정박하거든요.” 시장 초입에서 40년 가까이 베이글 가게를 운영해온 조니의 설명이다. 실제로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는 한 해 1000만 명 넘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것으로 추산하는데, 수산물 가게마다 이런 팻말이 걸려 있다. “미국 어디로든 배송 가능합니다.” ‘해안 도시는 음식이 맛있다’는 게 늘 옳은 명제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해안에 이런 시설이 버티고 있다면 미식 문화는 자연히 발달할 수밖에 없을 테다.

1860년대부터 조성되어 차이나타운, 니혼마치(일본), 필리피노타운, 리틀사이공, 흑인 커뮤니티까지 어우러진 유례없는 형태를 만든 C-ID(Chinatown-International District), 시애틀의 상징이 된 건축물 스페이스 니들과 이국 음식에 대한 열린 마음을 유산으로 남긴 1962년의 ‘센추리 21 엑스포’ 역시 시애틀의 미식 역사를 논할 때 으레 거론되는 것들이다. 하나하나 음식과 인류 문화사에 대한 흥미로운 인사이트로 가득한 이야기들. 하지만 시애틀의 푸드 신은 그런 오랜 역사들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앞서 말했듯, 놀라운 다양성과 개별성은 특정 지역이 아니라 시내 중심 곳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시애틀에 머무르는 내내 그 이유를 찾아다녔고, 가장 많은 사람이 답으로 내놓은 건 ‘글로벌 테크 기업’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아마존에 이어 애플, 구글, 메타까지 시애틀에 둥지를 틀면서 지난 10년 사이 이 도시에 새로운 물결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애틀은 ‘이식의 도시(Transplant City)’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2022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시애틀 인구 중 워싱턴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35%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시애틀 문화는 생각보다 보수적인 편이에요. 하지만 지난 몇 년 사이에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죠. 젊은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었고 그에 맞춰 편의시설, 레스토랑, 바 같은 새로운 수요가 생겨났으니까요. 그렇게 보자면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사람들이 원하는 건 정말 많은데, 샌프란시스코나 뉴욕에 비하면 아직 부족하잖아요.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성장 가능성이 큰 도시라고 할 수도 있을 테고요.” 시애틀에 위치한 모던 한식 레스토랑 파주의 오너 셰프 빌 정의 설명이다. 그를 알게 된 건 테이스트 워싱턴 2025에서였는데, 그가 언급한 ‘가능성’이 바로 해당 행사의 요지 같기도 했다.

셰프의 야식을 테마로 한 행사 ‘No Frills’에 나온 ‘퀸 애니멀 슬라이더스’. 테이스트 워싱턴 2025는 미식과 와인을 주축으로 한 11개의 다양한 이벤트로 구성되었다.

셰프의 야식을 테마로 한 행사 ‘No Frills’에 나온 ‘퀸 애니멀 슬라이더스’. 테이스트 워싱턴 2025는 미식과 와인을 주축으로 한 11개의 다양한 이벤트로 구성되었다.

워싱턴은 와인 산지로 각광받는 지역으로, 1000여 개의 와이너리가 자리하고 있다.

워싱턴은 와인 산지로 각광받는 지역으로, 1000여 개의 와이너리가 자리하고 있다.

200곳이 넘는 와이너리와 80곳이 넘는 레스토랑이 참여한 테이스트 워싱턴 2025의 그랜드 테이스팅 행사장.

200곳이 넘는 와이너리와 80곳이 넘는 레스토랑이 참여한 테이스트 워싱턴 2025의 그랜드 테이스팅 행사장.

테이스트 워싱턴은 매해 시애틀에서 열리는 와인 & 음식 축제다.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단일 지역 와인 & 음식 이벤트’로 회자되며, 25주년을 맞은 올해 행사에는 자그마치 200곳이 넘는 와이너리와 80곳이 넘는 레스토랑이 참여했다. 메인 행사라 할 수 있는 그랜드 테이스팅 행사장 한가운데에 서자 시애틀의 푸드 신은 다시 한번 경이로웠다. 역시나 세계의 음식 문화가 총망라되었는데, 그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깊이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얼할 정도의 상큼함에 입에 넣자마자 감탄을 내뱉게 되는 세비체, 셰프의 부친이 55년 동안 거리에서 팔았다는 말레이시아식 국수, 훈제 골수 수프를 곁들인 황소 혀 콩피 요리, 세 가지 우유에 적신 멕시코식 케이크… 파주에서 내놓은 것은 튀긴 버섯을 활용한 ‘베지테리언 김밥’이었는데, 그 모던한 개념이나 생김새에서는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맛이 났다. 이것저것 잔뜩 넣는 동안 어느새 우리가 잃어버린 맛, 질 좋은 김과 잘 지은 쌀밥이 만드는 클래식한 김밥의 맛이었다. “한식 하면 비빔밥, 불고기, 김치 이런 것만 생각하는 미국인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에게 제가 우선적으로 알려주고 싶은 건 한식의 식재료죠. 비교적 쉽게 다가설 수 있는 테크닉과 모양새인데, 딱 먹었을 때 한국적인 맛이 느껴지는 음식을 지향하고 있어요.” 빌 정의 설명이다. 올해 그랜드 테이스팅에는 7500여 명의 방문객이 몰렸다. 편견의 장벽을 싹 걷어낸 몇천 명의 사람들에게 셰프의 철학이 담긴 한 숟가락을 먹일 수 있는 행사. 그것만큼 한 도시의 미식을 진흥하기에 적절한 행사를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앞서 말했듯, 와인 역시 테이스트 워싱턴의 주인공이다. 우리에게 그리 익숙한 사실은 아니지만 워싱턴은 와인으로 유명한 지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산량 기준으로 미국 내 2위의 와인 산지다. 우딘빌 와인 컨트리, 야키마 밸리, 왈라왈라, 트라이 시티즈 커뮤니티즈 등 주 곳곳에 1000개 이상의 와이너리가 포진해 있으며, 심지어 시애틀 도시 경계 내에도 수십 개가 있다. 와인에 약간의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비가 많이 오는 도시에 와이너리가 있다고?’ 하며 놀라겠지만 말이다. 와인 산지의 절대 조건 중 하나는 포도가 색깔을 내기 시작하는 ‘베레종’ 시기에 비가 적절하게 내려야 한다는 점이다. ‘와인 벨트’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이 시기에 비가 많이 오는 곳은 포도를 묽게 해 와인 양조에 부적합하다. (한국이 가장 좋은 예시다.) 포도밭들이 비가 많이 오는 시애틀이 아니라 도시 외곽에 주로 위치한다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중요한 워싱턴의 포도 재배 지형을 말해준다. 태평양의 습윤 서늘한 바람은 캐스케이드산맥을 넘어가며 시애틀이 있는 산맥 서쪽에 비를 뿌린다. 산맥 서쪽에 있는 시애틀엔 비가 많이 내리지만, 산맥 동쪽에는 사막이 있을 정도로 강수량이 적다. 비를 내린 기단은 상대적으로 고온 건조해지는데, 그게 피노 누아 재배 산지인 오리건주(45도)보다 더 높은 위도인 우딘빌(46도) 등에서 와인용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이유다.

“물론 저희도 포도밭은 도시 외곽에 있죠.” 시애틀 시내의 와인 & 푸드 스페이스인 SODO 어번 웍스에서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는 앤드루 라타가 설명했다. 라타 와인을 비롯해 산맥 동쪽 산지에서 사입하거나 직접 기른 포도를 시애틀로 가져와 양조 작업을 하는 와이너리가 여럿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런 시스템에서 오는 장단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빤히 예상할 수 있듯, 단점은 밭에 한 번 가보려면 2시간 넘게 운전을 해야 하는 시간 소모의 문제다. “하지만 장점도 있죠. 방문객 입장에서는 멀리까지 와이너리 투어를 갈 수 없는 상황에도 좋은 상태의 와인을 맛볼 수 있으니까요. 말하자면 좀 더 소비자 베이스의 시스템인 거예요.” 우딘빌 와인 컨트리의 총괄 디렉터인 애덤 어캄포라의 설명에 따르면 워싱턴 와인은 ‘전통 방식을 철저히 고수하되 약간의 개성이 가미된 프리미엄 와인’이 주류다. 그런 와인들이 소비자 중심적인 시스템을 고민한다는 점 역시 시애틀의 미식 수준을 끌어올린 요인 중 하나였을 테다. 와인은 ‘페어링의 미학’을 가진 술이니까. 앤드루 라타는 테이스팅 세션을 진행하던 중에 해외에서 온 기자들을 보며 대뜸 이렇게 묻기도 했다. “맛이 어때요? 우리 와인들에 어떤 음식이 어울릴지 알려줘요. 잘하면 시애틀 시내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Credit

  • EDITOR 오성윤
  • PHOTO Aubrie Le Gault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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