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쉰이라는 괴물을 만나다

<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넘어서고 싶었던 그 무엇.

프로필 by 박세회 2025.03.10

쉰이 됐다. 쉰이라고 고백하는 것도 이젠 좀 지친다. 올해 들어 온갖 칼럼을 통해 “쉰이 됐다”고 양심적으로 고백해왔다. 사람들에게 당신의 나이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행위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제 나이 듣고 놀랐죠? 어려 보이죠?’라는 의미가 있다. ‘늙으면 늙은 거지 거기서 약간 어려 보인다고 대세에 큰 지장이 있나?’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이 옳다. 아무 의미도 없다. 정말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요즘 원치 않던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의 역습에 시달리고 있다. 클릭한 적이 없는데도 40~50대 여성들의 ‘저랑 남편 스무 살에 만났는데 아직도 스무 살처럼 살고 있어요’라고 자랑하는 숏츠가 이어진다. 스무 살처럼 사는 건 좋다. 스무 살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건 분명하다. 누가 봐도 그들은 40대다. 50대다. 카메라 앞에서 장원영처럼 턴을 하는 건 서른한 살 이후로는 금지해야 마땅하다. 스물아홉이 아니라 서른한 살인 이유는, 서른한 살에도 여러분의 틴더 프로필 나이는 여전히 스물아홉일 것이기 때문이다. 3년 정도는 헛된 꿈을 꿔도 괜찮다. 내 틴터 프로필 나이는 아직 마흔여덟이다. 당연히 사진은 필터로 살짝 돌렸다. 속은 얼고 겉만 탄 피자처럼 살짝 돌렸다.


사람들에게 나이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또 다른 이유는 이거다. 이른 포기다. 사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노화를 역행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그저 노화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선생님’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친한 척하는 사람들은 ‘김샘’이라 부른다. 선생님이든 샘이든 같은 말이다. 이제는 확실히 나이가 들었다는 의미다. 우리는 누구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가? 선생님이라는 단어는 가르치는 사람이다. 뭘 가르치려면 아는 게 많아야 한다. 아는 게 많으려면 나이를 먹어야 한다. 나이를 먹었는데 소셜미디어에서 온갖 주제로 아는 척을 하며 살아가는 나는 확실히 선생님이다.


선생님이라는 말이 싫었다. 기자님, 작가님, 평론가님, 편집장님 등 많은 호칭으로 불렸다. 선생님은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선생님이라 불린다는 건 중년을 지나 장년에도 접어들었다는 증거다. 글 쓰는 사람이 불릴 수 있는 최종 호칭이다. 쉰에 선생님이 된 자는 구십이 되어도 선생님이 된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대개가 20~30대일 것이므로 이 늙은 자의 징징거림이 딱히 와닿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을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나는 마흔이 되면 인생이 끝날 줄 알았다. 아직도 여러분 주변에는 헤비메탈 티셔츠 따위를 입고 “커트 코베인이 죽은 나이에 죽고 싶었어”라는 말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는 선생님이 있는가? 있다면, 당신은 나의 지인이 틀림없다. 영포피도 끔찍했는데 영피프티는 더 끔찍하다.


이제 인생의 비밀을 밝혀야겠다. 여러분은 쉰이 되면 몸도 성숙하고(썩는다는 이야기다) 마음도 숙성할 것이라는 환상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서른아홉처럼 행동하는 서른아홉인데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20대 초반처럼 생각하는 자아가 있는 것을 몰래 부끄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쉰 정도 되면 그런 자아는 마침내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분명히 이야기하겠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나이를 얼마나 먹든 상관없다. 당신 내부에 존재하는 20대 초반쯤의 자아는 오히려 늙으면 늙을수록 기어 나오려 애쓰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40대 중반을 넘어서서 “어린 시절 꿈을 이루겠어”라고 선언한 뒤 사업을 말아먹고 이혼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너 안 본 지 10년이나 됐다. 조만간 한번 보자”고 당신에게 전화를 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빨간색 포르쉐를 샀다며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는 것이다. 중년의 위기다.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공통적인 하나의 일관된 방법은 있다. 약이다. 약이 늘어난다. 약의 대부분은 영양제다. 나는 비타민 A부터 아마도 Z까지를 먹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보내주시는 정관장 스틱은 줄지도 않는다. 매일매일 서브스턴스를 집어삼키고 있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서라고? 인간은 그렇게 먼 미래까지 고민하며 살지는 않는다. 내가 영양제를 집어삼키는 이유는 젊음을 어떻게든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그래 맞다. 이미 절대적 의미의 ‘젊음’은 없다. 여기서 젊음은 상대적인 의미다. 인구분포도로 보면 나는 딱 중간 단계다. 중간 단계가 되면 정확하게 나보다 어린 존재와 나보다 늙은 존재로 인간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더는 절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로도 더는 젊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겠구나.


그게 왜 무섭냐고? 그걸 무서워하는 건 어른의 태도가 아니지 않냐고? 여기서 나는 20~30대 여러분의 미래를 예측해보고자 한다. 결혼율과 출산율은 이미 역사적으로 바닥이다. 지금 이 잡지를 보며 ‘저 발렌시아가 옷은 꼭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여전히 젊다고 생각하는 서른여섯 남성 독자는 바로 지금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당신의 황금기라는 것을 모른다. 물론 그 전에 지적하자면, 20대 초반 모델이 입은 그 발렌시아가 옷은 서른여섯인 당신이 앞으로 겨우 2년 정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여러분은 아마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서른여섯인 당신은 ‘아직 젊지 이 정도면. 요즘은 결혼도 다 늦게 하니까’라고 속으로 말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늙은 것이다. 젊은 자는 자기가 젊은 줄도 모른다. 그래서 젊은이다. 당신은 늙었다. 그러니 늙은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일반인보다는 연예인에 더 가까운 존재다. 돈 잘 벌고 멋있어서 연예인이 아니다. 연예인처럼 끊임없이 연애 시장에서 자신의 매력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쉰이 되어서도 쇼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사실 이 글은 영화 <서브스턴스>에 대한 글이다. 다들 <서브스턴스>를 보셨습니까? 안 봤다면 지금 바로 올레티비로 달려가서 보시길 영화평론가의 마음으로 간절히 권한다. 데미 무어가 한물간 배우를 연기한다. 에어로빅 방송에서도 해고될 상황에 절망하던 그는 젊어지는 약, ‘서브스턴스’를 누군가에게 받는다. 이 약은 정확한 용법이 있다. 약을 맞는 순간 자신보다 더 젊고 아름다운 버전의 클론이 몸에서 생겨나 떨어진다. 원본(데미 무어 분)과 클론(마거릿 퀄리 분)은 기억과 정신을 공유한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다. 한쪽이 활동하면 다른 하나는 혼수상태가 된다. 둘은 일주일씩 삶을 공유하며 영원히 젊음과 늙음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세상에는 정확한 용법을 지키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영화 <서브스턴스>에서는 클론이 자신이 활동하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원본의 시간을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영화에서뿐인가? 스타들은 시대를 역행하며 말라가고 있다. 위고비와 오젬픽으로 다시 기아 상태가 되어가는 할리우드 스타들을 보시라. 2025년의 리조는 2020년의 리한나처럼 보일 지경이다.


<서브스턴스>는 약과 욕망을 조절해 파괴되어 가는 주인공의 자아를 온갖 신체 변형과 고어로 변용해 관객에게 집어 던진다. 클라이맥스 부분부터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피떡칠 난장판 스펙터클은 울라고 만든 건지 웃으라고 만든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모든 게 조심스러운 2025년에 이 정도로 후련하게 끝까지 가버리는 영화는 흔치 않다. 교훈도 쉽다. 간단하다. 젊음에 집착하지 말라는 소리다. 아니다. 교훈이 이렇게 쉬울 리 없다. <서브스턴스>는 존경받던 여배우가 사회적 압박으로 젊음에 집착하다 내적으로 무너지는 과정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며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관객들의 눈앞에 가학적으로 들이미는 영화다. 당신이 이 영화를 보며 느꼈던 역겹고 혐오스러운 감정이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이 느꼈을 자기혐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느끼는 그것과 매우 유사하도록 설계된 영화다. 그리고 그것에 더해 내가 느낀 교훈은? 역시 쉰이 제일 무섭구나다.


<서브스턴스>의 주인공은 쉰이다. 갓 쉰이 됐다. 쉰이 되자마자 무시무시한 일들이 발생한다. 겨우 붙어서 밥벌이하던 방송사 중역이 말한다. “오십 줄이 되면 끝이야.” 그 남자는 스파클을 해고한다. 눈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담은 광고판이 제거된다. 그렇다. 여러분, 쉰이 바로 이런 나이다. 나는 쉰이 됐다. 하지만 <서브스턴스>의 가장 큰 아이러니가 남아 있다. 데미 무어는 예순둘이다. 그는 내가 <사랑과 영혼>을 극장에서 보며 울던 나이에도 누나였다. 이모에 가까운 누나였다. 예순둘 이모가 영화 속에서 쉰이 되어 늙고 한물간 여배우를 연기하며 몸서리를 치고 있다. 쉰의 데미 무어는 할 수 없었던 쉰이 된 연기를 예순둘의 데미 무어가 하고 있다. 시상식에 오른 데미 무어 사진을 봤다. 많아 봐야 쉰이다. 쉰이 마지노선이다. 디카프리오도 쉰이 되자 스물다섯보다 나이가 많은 모델을 사귀기 시작했다. 그도 깨달은 것이다. 쉰이 이렇게 무섭다.


나는 이 글을 쓰며 틴더 프로필 사진을 새로 찍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 필터를 너무 두껍게 바르는 건 자제해왔다. 모두가 필터를 쓰는 시대에 그거라도 써야 살아남을 것이다. 나이는 당분간 마흔여덟로 고정해야겠다. 앞으로 5년 정도는 통할지도 모른다. 혹시 틴더에서 나를 발견하는 젊은 독자들은 모른 척 지나가주시길 부탁드린다. 어차피 쉰이 된 남성 프로필이 여러분에게 뜰 리는 없다. 아니, 마흔여덟 남성 프로필 말이다. 그리고 이 글은 여러분이 마흔여섯이 되는 해에 다시 읽어주시길 바란다.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김도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MOST LIK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