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부자를 놀리는 즐거움

수 없이 쏟아지는 기사의 홍수 속에서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를 골라 독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본다.

프로필 by 박세회 2025.03.13

‘부잣집 아들 흉내 내는 영상을 올리던 남자가 이제는 포스팅 하나당 3만 달러를 번다’라는 제목을 <뉴욕 타임스>에서 봤을 때, 다른 기사에 눈을 돌리기란 불가능했다. 자그마치 <뉴욕 타임즈>의 베테랑 기자가 부자집 아들 흉내 영상을 올려 2백만 팔로워를 모은 에이리스 이거(Aris Yeager) 씨를 심층 인터뷰해 쓴 피처 기사였다. 세계 최고의 일간지가 이거씨자체를 하나의 현상으로 본 것이다. 이거 씨는 지난 2022년부터 프랑스에서 온 스포일드 차일드 캐릭터를 만들어 ‘더유러피언키드’(theeuropeankid)라는 틱톡과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 중이다. 그의 계정에 들어가면 어쩔 수 없는 현실 웃음이 터진다. ‘아빠한테 돈 달라고 조르는 유럽 부잣집 아들’이라는 제목의 영상에선 “아빠, 여기 진짜 다 비싸다”며 프랑스어 악센트로 “마이애미에 주말 동안 놀러 가는 데 1만(약 1500만원) 달러만 보내달라”고 조르는 모습이 담겨 있다. 얄미울 만큼 완벽한 프렌치 악센트 영어를 쓰며 전화기에 대고 떼쓰는 모습을 보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은 깊은 빡침을 느낀다. 실제로는 프랑스어를 비롯한 유럽 4개 국어 할수 있는 더유러피언키드 이거 씨의 가장 유명한 영상 중 하나는 나이트클럽 가드와 싸우는 장면이다. 대기 줄에 서 있는 이거 씨를 가드가 클럽 안으로 못 들어가게 막자, 그는 “네가 지금 막고 있는 사람이 누구 아들인 줄 알아?”라며 가드를 향해 “나 유럽에서 제일 돈 많은 집안 아들이야”라고 소리친다. 이거 씨는 주로 현장에서 상대역(여기서는 클럽 가드)을 캐스팅하는데, 관객까지는 캐스팅할 수가 없어서 종종 실제로 그에게 욕을 하거나 때리려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해당 영상에서는 이거 씨에게 뒷줄에 있던 사람이 “왜 너네 엄마가 아빠가 누군지 얘기 안 해줬어?”라고 소리친다. 이 영상이 유명한 이유는 또 있다. 하필 유럽에서 제일 돈 많은 집 아들은 딱 정해져 있어서 LVMH 집안의 알렉상드르 아르노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재밌긴 한데, 나도 아니고 우리 형도 아님”이라고 공식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이다. 더 재밌는 건 그의 영상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실제 부자들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부자 친구들이 늘 제 영상을 주고받으면서 ‘이거 완전히 너네 아들 아니냐’라며 서로 놀려요.” 이거 씨가 <뉴욕 타임스>에 한 말이다. “부자들도 우리랑 똑같아요. 부자들도 부자를 놀리는 걸 좋아한답니다.” 학비가 1년에 4만5000달러나 하는 브뤼셀의 국제학교 출신이라 주변에 수많은 부자 친구들을 둔 이거 씨이기에 깨달을 수 있는 말이다. 부자도 부자 놀리는 걸 좋아한다는 진실이 얼마나 오래됐는지를 아는 것도 흥미롭다. 이 기사를 읽은 며칠 후 아주 우연하게 나는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있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매혹적인(적어도 내게는) 이 소설은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의 오빠인 스테판의 얘기부터 시작한다. 스테판은 ‘막강한 권력을 가졌거나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했으며, 러시아 고위 인사들 가운데 3분의 1은 그의 아버지의 친구들이었고 나머지는 그와 직접적인 친분이 있었다. 그는 월급을 많이 받는 직위를 차지하기 위해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었고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도, 누군가와 애써 큰 소리를 내며 다투지도 않았다. 아침이면 부츠와 신문을 들고 들어오는 하인, 콧수염을 다듬어주는 하인, 시계 태엽을 돌리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젊은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우다가 어느 날 연애 편지를 아내에게 걸리는 바람에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는데, 스테판은 그런 상황에도 친구를 만나 ‘에르미타주 앙글리아’(실제로 러시아에 있던 호텔로 서울의 신라호텔 같은 곳이다)에서 샤블리 와인에 생굴을 스무 개도 넘게 먹는다. 굴도 그냥 굴이 아니라 플렌스부르크산으로. 나는 그 세세한 묘사들을 읽다 문득 톨스토이가 어지간히 부자들을 놀리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들을 버려가면서까지 금단의 사랑에 빠진 안나가 이탈리아 소도시의 한 팔라초에서 누리는 부귀와 그의 사랑 브론스키가 할 일이 없어 그림 쇼핑을 하는 장면에 다다르면 내 의심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톨스토이의 마음 역시 우리 시대의 틱토커 에이리스 이거 씨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또 있다. 톨스토이는 농노 시대부터 귀족들의 삶을 아주 세세한 조롱의 눈빛으로 묘사하며 부자를 놀리는 즐거움을 만끽했는데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씨도 자신은 ‘중산층’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중산층은 우리가 말하는 것과는 크게 다를 것이다.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미 포스팅 한 번에 3만 달러를 받는 이거 씨는 루프톱에 볼링 앨리와 수영장이 딸린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고 하니, 부자도 부자를 놀리고 싶어 한다는 자신의 말을 미래완료형으로 증명한 셈이다. 최근에는 나의 최애 코미디언 이수지 씨가 몽클레르를 입고 대치맘 흉내를 내는 영상이 크게 바이럴됐다. 톨스토이의 소설을 보면, 당대의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맘들은 아이들에게 말을 할 때면 프랑스어를 섞어 썼다. 영어를 섞어 쓰는 대치맘들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부자를 놀리고 싶어 할까? 그 결론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우리는 가난을 조롱할 순 없기 때문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가난을 조롱하지 말 것. 부자를 조롱할 것. 가난을 조롱하기 시작한 수저계급의 시대에 반드시 지켜야 할 말이다.

Credit

  • ILLUSTRATOR 이은호
  •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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