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MBTI, 나르시시스트, 혹은 폴리아 되
당신을 규정하는 모든 언어들의 속내에는 무엇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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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기대 속에 개봉한 명작의 후속작은 로튼 토마토 팝콘 지수 30%대를 기록했으며, 역사상 최악의 평점을 받은 코믹스 원작 영화로 불리며 나락으로 떨어졌다.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한 영화의 내용에 있었다. 사람들은 1편에서 탄생한 거대한 악의 화신 조커가 불바다가 된 고담을 주름잡으며 날아오르는 내용을 기대했지만, 영화가 보여준 것은 ‘아서 플렉’이 자신의 상징인 조커를 벗어나 소시민으로 돌아오려다 모두에게 외면받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김빠지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정의하고 인식한 ‘조커’의 모습에서 벗어나려 한 영화 <조커> 역시 아서 플렉처럼 사람들에게 살해당한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상징이 되는 것을 거부한 영화와 현실이 서로 나란히 추락하는 이 모습은 그 자체로 21세기에 새롭게 나타난 ‘오이디푸스의 신화’의 변주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기원인 아버지 라이오스 왕을 살해하고 그 자리를 차지했으며 아서 플렉은 자신으로부터 파생된 조커를 추종하는 자에게 살해당한다. 그리고 21세기의 우리는 스스로가 즐기고 만들고 재생산한 상징 혹은 유행어(Meme)로 스스로를 정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부제인 ‘폴리 아 되’(공유된 정신병이라는 뜻)를 통해 감독은 음산한 질문을 던진다. “MBTI, 성인 ADHD, 나르시시스트. 너희들이 죽고 못 사는 너희를 표현하는 상징들. 그것들이 하나의 거대한 망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사람과의 첫 대면에서 자신을 ENTP, 혹은 INFP라고 소개한다. 성인 ADHD 검사를 받은 삼수생이 자신이 ADHD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병원을 찾아다닌다. 자신의 어머니가 나르시시스트라고 결론 내리고 이를 전문가가 동의하지 않자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예전에는 심리학이 사람들을 반영했으나 요즘은 심리학에 사람들이 스스로를 욱여넣는다.
어째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굳이 언어의 틀에 가두려고 할까? 그것은 불안을 다루는 우리의 사고 구조에서 기인한다. 정신분석의 거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이 언어를 통해 현실의 일부를 심층 의식으로 들여오고, 다시 이 현실이 반영된 심층 의식이 언어를 통해 표층 의식으로 나와 인식되고 조절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주장은 세부 영역에 오류가 있을지언정 여러 뇌과학적인 발견을 통해 큰 줄기는 진실로 인정받고 있다.
즉 우리의 뇌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상징화를 통해, 마치 체스 기사가 체스 말을 통해 전장을 표현하는 것처럼 다룬다. 이는 특히 우리가 두려워하는, 다루기 힘든 현실을 다룰 때 더 두드러진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에게 말로써 풀어낸 ‘그날의 끔찍한 기억’은 현실에 존재했던 실체적 고통 그 자체가 아니다. 실체적 고통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소통과 공유의 모든 과정에서 언어는 환자와 의사가 의식 세계를 공유하고 조율하는 훌륭한 체스 말로서 기능한다. 모든 정신과 심리에 대한 치료가 언어를 매개체로 이루어지는 이유다. 언어가 의식을 지배하기에.
만일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은 언어로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인간의 정신을 I나 E 혹은 나르시시스트나 박애주의자 등으로 나누고 또 나누어 분류하면 결국 우리는 인간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언어로 된 분류로 모든 인간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비슷한 시도가 일찍이 정신분석계에도 있었다. 초기의 정신분석가들은 인간의 정신을 나누고 분류하는 방식으로 정신의 본질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러자 발견된 것은 모두 비슷했다. 성욕과 공격성 그리고 열등감과 파괴에 대한 욕구 등. 그래서 이들은 결론지었다. 인간은 결국 똑같다고. 인간의 정신작용은 태어나면서부터 생물체로서 형성된 내적 반사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따라서 이러한 생물학적 내적 원인이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며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부 어떤 정해진 이유가 있다는 시선을 바탕으로 인간을 분석했다. MBTI에서 인간을 외향적, 내향적 혹은 감각적, 직관적 인간으로 분류하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에는 심심치 않게 오류가 일어나곤 한다. 오류는 때로는 너무나 커져서 인간을 효과적으로 분류하여 분석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현실과는 전혀 딴판인 편견이나 망상이 되기도 한다. 영화 조커에서 일어난 일처럼 비대해진 상징이나 개념이 현실을 뇌 속에서 왜곡시키는 것이다.
세상을 언어화하여 뇌 속으로 들여오거나 혹은 우리의 생각을 언어화하여 세상 밖으로 내놓을 때, 뇌는 때때로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받는다. 정확히 표현하는 대신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상징성을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상징성을 유지하여 다루기 편하게 되는 대신 왜곡을 감수할 것인가? 우리의 뇌는 대부분의 경우 후자를 선택한다. 오류가 섞인 정확하지 않은 상징으로 그 나름의 체계를 구축한 다음 현실적으로 보면 오류투성이지만 내부에서 보면 어느 정도 말은 되는 대안 현실을 형성하여 운영한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실체를 완전히 이해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이를 표현할 것이냐, 또는 ‘내향적이고 낯을 가리는 인프피(INFP) 친구’라는 단순한 상징으로 그 사람의 실체를 ‘납작하게’(문학에서 자주 쓰는 표현이지만 정확해 보인다) 처리할 것이냐의 선택에서 뇌는 후자를 선택한다. 불안과 고통에 붕괴되는 것보다는 왜곡되어 불완전하게나마 체계를 만들어 운영하는 게 정신에는 더 나은 일이기 때문이다.
임시로 만들어둔 이 상징을 현실로 굳게 믿을수록 내가 인식한 세상은 현실의 모습과는 멀어지게 된다. ‘망상적 사고’의 시작이다. 효율적이지 못했던 나의 시간 관리 능력과 노력들은 선천적인 질환의 증상(예를 들면 ADHD)이 되고, 도무지 소통하기 어려워 두려움을 유발하는 상대는 공감 능력 없는 무자비한 괴물(수많은 부장이 소시오패스 소리를 듣는다)로 단순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을 진리이며 결코 변화될 수 없다고 여긴다. 현실과 상관없이 인간의 심리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이쯤 되면 이제 인간의 뇌에서는 현상이 상징을 만드는 게 아니라 상징이 현실을 정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정신세계 속에서는 거대해진 조커라는 상징이 원본인 아서 플렉을 죽이고 도시를 불태우듯, 상징이 현실을 대체해간다. 이제 왜곡되지 않은 부분보다 왜곡된 부분이 더 많아진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너는 나르시시스트이자 감정 흡혈귀고, 나에게 공감해주지 못하는 너는 T이고, 아스퍼거이며, 나는 늘 학대받는 엠패스이며 초민감자다. 오직 금수저만이 가치 있고 자유로우며 흙수저로 태어난 나는 어떠한 노력을 해도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인간의 모든 행동의 원천과 이유는 자신의 ‘섹스’와 ‘번식’이며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크게 보면 결국 유전자의 이기적 생존전략에 불과할 뿐이다. 미리 정의된 세상, 미리 정해진 나. 그 단순하고 명쾌한 세상 속에 홀로 남겨진 나는 안락하지만, 사실 현실의 그 어떠한 것도 바꾸지 못한다. 왜곡되어 명쾌해진 세계에 스스로를 가두고,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현실은 눈을 돌려버리는 뒤틀린 세계의 혼자 남은 황제처럼.
그러나 이제 질문을 던져보자. 같은 MBTI를 가진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모두 비슷하게 반응할까? 누군가가 나에게 준 상처가 그의 정신적 특성에 의한 것이라면 그를 만난 모두가 전부 같은 상처를 받을까? 만일 인간에게 생명이나 식사, 대인관계, 삶 등 문명 그 자체가 제한된다면 인간은 모두 원래 정해진 생물학적 본능대로 짐승이 될까?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유대인 심리학자 빅토르 프랑클은 이에 반대한다. 그는 식사가 박탈되고 안전이 박탈되고 삶이 박탈된 비참한 수용소에서의 인간 개개인의 행동을 관찰했다. 인간의 본질이 단지 몇 가지의 간단한 분류로 나뉜다면 인간이 보이는 행동은 대체로 비슷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인간은 모두 제각기 달랐다. 누군가는 일찍 절망하여 삶을 포기했고, 누군가는 조금이라도 타인 몫의 빵을 빼앗으려 발버둥 쳤다. 누군가는 자신의 따뜻함을 포기하고 누군가에게 담요를 덮어주었으며 누군가는 인간을 한데 규합하여 인간성을 잃지 않고자 했다. 각자 그 안에서 다른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발견한 자신만의 의미대로 살아갔던 것이다. 프랑클은 결론지었다. 인간은 모두 다르다고. 사물들은 서로가 서로의 의미를 결정하지만 인간의 정신만은 스스로가 자신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동물들이라고.
모든 심리학적 용어, 혹은 상징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상징과 단어 하나하나에는 일각의 진실이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며, 잘못된 표현이나마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부를 수 있게 함으로써 혼자 쓸쓸히 죽어갈 수도 있었던 인간을 정신건강의학과로 향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니 더더욱 알고 있어야 한다. 언어와 분류체계, 그 자체가 인간의 정신은 아님을. 인간이 언어와 이념의 노예가 아니라 언어가 인간에게서 나온 것임을,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상징이나 개념이 반드시 진실이 아니라 ‘폴리 아 되’일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때문에 우리의 두 눈 중 한쪽은 반드시 상식이나 경험론에서 벗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어야 한다. 상징 그 자체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임시적인 것이므로. 심리학이 우리를 정의하는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정의하는가? 로고테라피의 창시자 빅토르 프랑클은 죽음과 맞닿아 있는 수용소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역동성이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유 의지로 선택한 가치 있는 목표다.”
권순재는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및 치매전문센터장을 거쳐 현재는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의 원장이다.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와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를 발간했고, AI 기반 심리검사센터인 ‘브레인맵 심리검사 센터 강남점’을 운영 중이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권순재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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