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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 아트 위크의 기억 (1) 환상과 현실_안동선

아트 위크가 지난 후 미술 전문가들이 남긴 3장의 사진과 사연.

프로필 by 박세회 2024.09.27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제시 천의 퍼포먼스 현장.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제시 천의 퍼포먼스 현장.

환상과 현실
writer 안동선

“환상적이지 않나요? 작가가 배경색을 깔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요.” 레오노라 캐링턴의 <Tower of Nagas>(1991) 앞에서 우연히 만난 우한나 작가가 말했다. 우리는 사전에 약속한 사람들처럼, 파란색과 분홍색으로 뒤덮인 탑 주변의 여러 기이한 생명체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감탄 섞인 이야기를 나눴다. 한화그룹에서 주최한 특별 전시 프로젝트 ‘살롱한남’이 옥션하우스 소더비와 협업한 특별전 <상상적 세계: 여성 초현실주의>에서였다. 전시는 캐링턴을 비롯해 앨리스 라혼, 프리다 칼로 등 멕시코에서 활동한 여성 작가들이 토착 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한 독특한 예술 세계를 소개한다. 특히 19세 때 막스 에른스트와의 만남으로 유럽 초현실주의 그룹에 속하게 된 캐링턴은 종종 ‘뮤즈’로 대상화되었으나, 1940년대 멕시코에 정착하면서 자기만의 초현실주의를 펼쳐나갔다.
16점의 회화와 드로잉으로 이뤄진 소규모 전시였지만 감상하며 흥분한 탓인지, 전시장을 나서자마자 급격하게 허기가 느껴졌다. 다행히 살롱한남에서는 좋아하는 멕시코 식당 엘몰리노의 팝업이 열리고 있었다. 타코를 받으려고 선 줄에서 친분이 있는 아트 컬렉터 ‘지혜 쌤’을 만나 자연스럽게 합석했다. 한 손으로는 타코를 곱게 접어 입안으로 밀어 넣고 다른 손으로는 마르가리타 잔을 부딪치며 지혜 쌤에게 예비 큐레이터 은송 씨를 소개받았다. 그녀는 얼마 전 도쿄도 미술관에서 열린 조르조 데 키리코 개인전에 다녀왔다고 했다. 키리코는 우리가 초현실주의 하면 떠올리는 (남성) 화가들, 에른스트, 달리, 마그리트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리스 태생의 화가다. 우리는 도록으로 키리코가 창조한 몽환적인 도시 풍경을 감상하며 “왜 이런 전시는 한국에 오지 않을까”라는 오래된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길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살롱한남 맞은편 타데우스 로팍에서 개인전 <Soul>을 선보이고 있는 션 스컬리의 아티스트 토크가 곧 시작할 터였다. 서둘러 길을 건너 전시장으로 들어서자 이미 지난 50년간 커다란 캔버스에 수평, 수직의 색띠를 연속해 그려온 이 시대 가장 유명한 추상화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탈영병이었던 아버지와 보드빌 가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홈리스로 생활할 만큼 가난했던 유년 시절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막힘없이 이어졌다. 작가에게 지독한 가난은 불편을 초래하긴 했지만, 장애가 되지는 못했다. “당신이 가진 것, 진정으로 소유한 것은 영혼뿐”이라며 이번 전시 제목을 ‘Soul’이라고 지은 션 스컬리는 말했다. “비판이 없는 삶은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특권을 갖고 태어난 삶이 바로 그렇죠. 제가 힘들게 자랐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싸우거나 쟁취하여 얻어야 할 게 없다면 모든 게 너무 쉬워져요.”
동시대 작가를 좇는 일은 창작을 업으로 삼은 작가들의 고투 속에서 보석 같은 무언가가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겪은 정신적, 금전적 고통이 컸는데 그래서인지 여한 없이 무대를 즐겼어요.” 한국 전통무용의 형식과 레이브 문화를 회화, 패션, 클럽 음악과 연동하여 ‘논-버벌’(non-verbal) 파티 형식의 공연 <Shimmering>으로 선보인 이양희 작가가 말했다. 격납고였던 공연장 중앙에 박민하 작가의 회화 작업이 무대로 세팅되고 춤의 형식을 깨친 12명의 무용가가 쾌락의 정점을 경험하며 끝없이 회전할 때 관객에게 전이된 감각은 짜릿한 희열이 분명했다. 나는 작가에게 답례로 ‘비언어적 상호작용은 의사소통 형식 중 최고’라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단호한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요즘 퍼포먼스 아트에 부쩍 관심을 두게 되어, 프리즈 서울이 처음으로 프리즈 라이브(Live) 프로그램을 도입했다는 소식에 귀가 번쩍 뜨였다. “비물질적인 에너지”를 매체로 삼는 작가들의 “오직 그 순간에만 살아 있는 실천”을 보기 위해 어느 날엔 갤러리 야외 공간을 찾았고, 또 어느 날엔 페어장에 마련한 라이브 부스로 달려갔다. ‘삼청 나이트’가 있던 수요일 밤, 갤러리현대 앞마당에는 무수한 인파로 커다란 원이 생겼다. 드로잉, 영상, 설치 등 다채로운 매체로 비선형적인 시간성과 언어의 가능성을 다뤄온 제시 천의 퍼포먼스 작품 ‘탈언어화의 악보(천지문 그리고 우주, no.042823)’(2024)를 보러 온 관객들이었다. 이 작품에는 한국 민속 퍼포먼스 아티스트 김향수리와 안유희가 함께했다. ‘소리의 힘’이 강력하게 발휘되는 해(亥) 시에 새하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두 무용수가 상모를 돌리고 소리를 내 원래 드로잉 설치 작품인 ‘탈언어화의 악보’를 활성화했다. 미술 애호가라면 그 특별한 광경에 주석을 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90년 여름 같은 자리에서 백남준이 평생 친구였던 요셉 보이스를 추모하며 열었던 진혼굿 퍼포먼스에 대해, 마치 직접 본 것처럼 강렬한 인상을 갖고 있을 테니까.
이틀 뒤에는 페어장의 라이브 부스에서 불교 의식을 재해석해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향한 씻김을 하는 차연서 작가의 <황혼이 질 때면>을 보았다. 그리고 현장에서 이번 라이브 프로그램을 기획한 아트선재센터의 프로젝트 디렉터 문지윤 큐레이터를 만났다. “방금 어떤 관람객이 ‘눈물이 났어’라고 하더라고요. 이 작품이 일종의 천도재거든요. 어떠한 배경 설명도 없이 전해지는 게 있는 거죠. 저 역시도 퍼포먼스의 강력한 힘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기획하지 않더라도 다음 해에도 꼭 라이브 프로그램이 계속되길 바라요.” 한동안 올해의 프리즈가 마지막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떠돌았다. 3회째에 비로소 안착한 ‘아트 명절’이 계속되기를, 그래서 더 많은 관람객이 퍼포먼스가 활성화되는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who’s the writer?
안동선은 <하퍼스 바자>에서 아트를 담당하며 <바자 아트>의 편집자로 오랜 기간 일했다. 2023년 저서 <내 곁에 미술>을 펴내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현재는 미술 콘텐츠 기획과 미술 취재를 병행하며 작가로서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Credit

  •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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