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는 대부분 비교 선택의 결과다. 더 정밀한 무브먼트를 탑재한 시계, 비슷한 가격에 더 나은 소재로 만든 재킷, 돼지고기 함유량이 높은 소시지. 재화의 세계야말로 무한한 적자생존의 세렝게티다. 그런데 드물게 경쟁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물건도 있다. 꼭 그 물건이어야만 해서 도저히 다른 대안은 떠오르지도, 떠올릴 필요도 없는 압도적 소비재. 그런 권위의 정점에 롤스로이스 컬리넌이 있다.
「
EXTERIOR
」
컬리넌의 존재감이 시간 개념에도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이 차가 출시된 지 6년이나 됐다는 사실이 놀랍다. 하늘을 향해 우직하게 뽑아 올린 선이 롤스로이스 디자인의 요체라면 컬리넌은 그 점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차다. 바꿀 때는 됐지만 바꾸기에는 아까운 디자인이라는 뜻. 그래서 롤스로이스는 컬리넌 시리즈 II의 외관을 뒤엎기보다 보정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수직 주간 주행등을 넣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강조하고, 차량 중앙부에서 외곽으로 완만한 ‘v’ 자를 그리게 범퍼를 설계해 날렵한 인상을 가미했다. 최근 트렌드를 반영한 은은하게 조사되는 일루미네이티드 판테온 그릴과 23인치 휠을 적용한 정도가 이번 모델의 눈에 띄는 변화다. 튜닝 해머로 피아노 현을 조율하듯 아주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기존 디자인을 매만졌다. 덕분에 조금 더 화려하고 여전히 품위 있어 보인다.
은은하게 빛나는 일루미네이티드 판테온 그릴.
「
DRIVING
」
23인치 휠 채용으로 밸런스가 더 좋아보이는 후측면.
23인치 휠을 적용해 걱정했던 승차감은 그저 기우였다. 도로에서 바퀴를 굴리는 감각이 아닌 물 위를 유영하는 요트의 부드럽고도 매끈한 감각. 컬리넌 시리즈 II의 에어 서스펜션은 작은 충격은 여지없이 지워버리고 날카롭고 큰 충격은 두툼한 물체에 싸인 것처럼 아득하고 뭉툭하게 전달한다. 그래서 요철을 밟은 것이 아닌 잔파도가 뱃머리를 때리는 느낌에 가깝다. 브랜드가 주장하는 ‘매직 카펫 라이드’라는 용어가 과장이 아님을 바퀴를 굴리는 매 순간 체감할 수 있다. 요즘 좀체 보기 어려운 12기통 엔진에서 뽑아내는 힘은 가속페달을 아무리 깊게 밟아도 짜내는 기색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블랙 배지 기준 최대 출력 600마력, 최대 토크 900Nm의 성능이 6.75L의 엄청난 배기량에서 뿜어져 나오니 전 영역에서 시종일관 여유롭다. 마치 엔진의 힘 자체보다 풍부한 힘의 질감에 집중한 듯 보인다. 그렇게 넉넉하게 나온 출력은 숙성이 될 대로 된 ZF 8단 미션을 거쳐 바퀴로 전달된다.
「
INTERIOR
」
컬리넌 시리즈 II의 호화로운 내부.
컬리넌 시리즈 II에 타고 있으면 기존에 감각세포가 처리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정보가 들어와 어리둥절하다. 예를 들면 청각. 아무리 높은 속도로 달려도 스위스 안전 금고에 들어온 것처럼 적막하다. 굳이 들으려고 애쓰면 타이어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정도. 엄청난 운동에너지를 지닌 물체가 전진하는데 정작 드라이버는 세계와 단절된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롤스로이스가 왜 그토록 ‘유령’이라는 단어를 차에 자주 사용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촉각. 컬리넌 시리즈 II에 사용한 모든 소재는 눈속임이 없다. 금속으로 보이는 것은 전부 금속이고 가죽으로 보이는 것은 전부 가죽이다. 여느 차에 있는 금속인 척하는 플라스틱, 가죽인 척하는 인조가죽이 없다. 크롬 도금한 부품도 플라스틱이 아닌 스테인리스스틸이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를 묻자 소재 개발 담당은 “금속은 미세하지만 각기 다른 질감과 온도가 있는데 손으로 만졌을 때 가장 좋은 감촉이 무엇인지 연구해 그걸 고스란히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호화스러운 부분은 그뿐만이 아니다. 센터페시아의 시계는 환희의 여신상이 떠받친 듯한 형태로 조형한 후 이를 보석 진열장처럼 배치했고, 조수석 앞 일루미네이티드 페시아는 여러 겹의 강화유리에 7000개의 점을 레이저로 새겨 넣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시트 소재로 오더 메이드 할 수 있는 ‘듀얼리티 트윌’은 최대 220만 개의 스티치와 18km 길이의 실이 사용된다. 컬리넌 시리즈 II에 활용된 공예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에스콰이어> 8월호 한 권을 다 할애해야 할 지경이다.
컬리넌은 롤스로이스에게 상징적인 차다. 이 모델 출시 후 오너 드리븐 비율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컬리넌 출시 당시엔 오너 드리븐 비율이 70% 남짓했지만, 현재는 그 비율이 90%가 넘는다. 또 이 차는 롤스로이스 고객의 평균연령을 2010년 56세에서 현재 43세로 대폭 낮추는 데 일조했다. 직접 차를 모는 부유한 젊은 고객이 롤스로이스를 더 많이 찾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롤스로이스 라인업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모델이다. 한편 컬리넌은 우리에게도 상징적인 차다. 최적화와 가성비가 진리로 군림하는 시대에 이처럼 제조업체가 공정의 타협 없이 완성한 물건은 흔치 않다. 누군가는 이 차의 가격과 사치스러운 면만을 자극적으로 보도하겠지만 에디터는 이런 물건이 여전히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누군가는 여전히 진짜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해 고집부리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