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D

보르도 밖에서 만든 세상의 다른 보드로들

보르도 말고, 다른 곳에서 만든 보르도 블렌딩들. 그중 마시기 좋은 젊은 것들을 골랐다.

프로필 by 박세회 2024.05.15
(왼쪽부터)‘일 파우노 디 아카넘 2021’ 12만원대. ‘에스쿠도 로호 그란 리제르바 2020’ 4만원대. ‘조셉 펠프스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2021’ 가격 미정. ‘이 그레삐 그레삐깐테 2020’ 12만원대.

(왼쪽부터)‘일 파우노 디 아카넘 2021’ 12만원대. ‘에스쿠도 로호 그란 리제르바 2020’ 4만원대. ‘조셉 펠프스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2021’ 가격 미정. ‘이 그레삐 그레삐깐테 2020’ 12만원대.

전통적인 레드 와인의 세계는 깊고 광대하지만, 아주 크게 나누면 보르도 스타일과 부르고뉴 스타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부르고뉴 하면 피노 누아, 피노 누아 하면 아름 다운 가닛빛이 감도는 꿈결 같은 빛깔, 섬세한 부케와 라이트한 보디감, 부드러운 타닌, 짭쪼름한 미네랄리티가 떠오른다. 한편 ‘보르도’라고 하면 루비에 가까운 진한 포도빛, 투과성이 적은 헤비한 보디감, 입안을 잔뜩 조여주는 타닌, 마치 고기를 먹은 것만 같은 강한 감칠맛, 혀끝을 간질이며 사라지는 풀, 피망, 파란 채소들의 향기, 담뱃잎을 질근질근 씹는 듯한 맛, 숙성한 와인의 경우 가죽과 흙의 거친 향과 질감까지 온갖 정보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꽉 찬 육각형. 넷플릭스의 <피지컬 100>에 나올 것만 같은 육체미의 향연이야말로 보르도 와인의 상징이다. 이렇게 꽉 찬 육각형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보르도 ‘블렌딩’이다. 페퍼리하고 강렬한 타닌과 감칠맛을 가진 카베르네 소비뇽, 부드러운 메를로, 섬세함과 부케를 더하는 카베르네 프랑 거기에 컬러감을 더해주는 프티 베르도까지 블렌딩한다. 당연하게도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이 뛰어난 블렌딩 기술은 보르도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전 세계 주요 와인 산지들에서 나름의 방식대로 자신들만의 보르도 블렌딩을 시도 중이다. 이 페이지에 모은 와인들은 모두 각자의 보르도 스타일을 완성한 이탈리아, 칠레, 미국의 보르도 스타일 와인이다. 슈퍼 투스칸인 아카넘의 ‘일 파우노 디 아카넘 2021’은 붉은 베리류의 프레시안 향과 잘 익은 자두의 단맛, 강하지만 부드러운 타닌감과 특히 멋진 타바코와 페퍼리한 느낌이 훌륭한 감칠맛과 어우러져 즐거움을 선사한다. 무통 로칠드를 소유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바론 필립 로스차일드가 칠레에서 보르도 스타일로 양조하겠다며 만든 ‘에스쿠도 로호’의 2021년 빈티지는 그야말로 칠리안 보르도의 정석이다. 검은 베리류를 떠올리게 하는 향과 쌉쌀한 초콜릿의 뉘앙스, 나무껍질, 파프리카 등의 다채로운 향미들 사이로 아주 옅은 바닐라 터치가 빛난다. 인시그니아의 엔트리 레벨 와인 ‘조셉 펠프스 카베르네 소비뇽 2021’은 언뜻 봐서는 보디감이 약할 것처럼 가닛빛이 감돌지만, 입안에 넣으면 검은 베리류와 각종 스파이시한 감각, 말린 허브와 담뱃잎, 건포도에서 살짝 느낄 수 있는 과립의 감각까지 온갖 맛과 향이 종합 선물 세트처럼 밀려온다. 특히 긴 여운이 무척 인상적이라, 과연 ‘베이비 인시그니아’라 불릴 만한다. ‘이 그레삐 그레삐깐테 2020’은 슈퍼 투스칸의 탄생지로 유명한 토스카나 해안 볼게리 지역의 와인이다. 이 그레삐(I Greppi)는 볼게리의 중심인 그레피 쿠피 호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포도원에서 프랑스 품종들을 기르고 양조한다. 블랙 커런트, 말린 로즈메리, 붉은 베리류를 연상케 하는 향기와 뭉근한 감칠맛의 밸런스가 정말 완벽하다. 특히 마지막에 코끝을 스치는 후추와 담뱃잎, 그리고 젖은 가죽 냄새가 한층 다층적인 맛을 완성한다. 원래 보르도 스타일의 와인은 속내를 밝히지 않는 경상도 남자처럼 갑갑해서 오랜 시간이 지나고 타닌이 부드러워진 후에 따야 제대로 된 그 와인의 포텐셜을 모두 느껴볼 수 있다고 배웠고, 실제로 많은 보르도가 그렇다. 이 페이지에 있는 보르도 밖의 보르도들은 10년 넘게 숙성할 수도 있지만, 바로 따서 마셔도 좋은 와인들이다. 디캔터에 넣고 30분만 지나도 갑갑했던 향들이 활짝 피어난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PHOTOGRAPHER 정우영
  • ART DESIGNER 김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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