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골 한화 팬 야구 기자의 고백 "한화 이제 야구도 잘 하는 겨?!"
모태 한화팬은 올 시즌 어떤 마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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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면의 담당 에디터가 내게 물었다. ‘올 시즌 짜릿했던 승리의 순간은 언젠가요?’ 꼽아보려고 잠시 생각해보니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시즌 초반 부진 탈출을 이끈 문현빈의 삼성 원정 9회 투아웃 역전 홈런, 독립리그 신화를 쓰고 있는 황영묵의 LG 홈 경기 역전 결승 투런 홈런, KIA와 전반기 최종전에서 나온 문현빈의 끝내기 안타, 류현진을 동경하지만, 류현진을 뛰어넘는 한 경기 최다 18탈삼진으로 승리를 이끈 폰세의 탈삼진쇼까지. 내 몸을 누르면 자동 반사처럼 줄줄줄 읊을 수 있을 정도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보살’이라 불리던 한화 팬이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보살이 되었을까? 그 과정은 어떻게 보면 운명이고, 생생한 에피파니의 결과이며, 대부분은 나의 선택이었다. 한밭야구장이 보이는 보문산 자락에서 태어난 나에게 아버지의 직장마저 야구장 인근에 있었던 한화, 그 시절 빙그레는 운명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동양백화점에서 어린이 회원 모집 공고가 뜨면 모아놓은 용돈을 들고 가장 먼저 달려갔다. 이글스 점퍼를 입고 붉은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검은색 벨크로(찍찍이) 지갑을 들고 다니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내 유년 기억 속 한화는 ‘최강’이었다. ‘연습생 신화’이자 최고의 홈런 타자 장종훈, 불멸의 ‘대기록’을 보유한 왼손 에이스 송진우, ‘돌직구’를 뿌리며 마운드를 호령한 정민철, ‘대성불패’ 구대성, 여기에 ‘악바리’ 이정훈, ‘영원한 2번 타자’ 이강돈, ‘마운드의 연습생 신화’ 한용덕까지. 탄탄한 투타 전력을 자랑하며 1988년부터 1992년까지 5년 동안 무려 네 차례나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한밭야구장에서 목청껏 응원했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한 날이 더 많던 시절, 가장 특별했던 경험은 따로 있었다. 새로 이사 간 아파트 윗집에 인사를 갔는데, 문을 열고 나온 아저씨가 당대 최고의 투수 선동열을 상대로 두 차례나 홈런을 때렸던 전대영이었다. 황소도 때려잡을 거 같은 손으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 그 떨림이란. 아마도 그때가 내겐 현신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1999년, 7년 만의 한국시리즈에 대전이 들썩였지만,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 야구장 직관은 언감생심이었다. 롯데를 4승 1패로 물리치고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는 순간을 집에서 TV로 보던 나는 이때부터 조금씩 진로에 대한 방향을 잡아간 것 같다. ‘야구를, 스포츠를 마음껏 볼 수 있는 일을 하자’고.
그런데 한국시리즈 우승에 모든 불꽃을 태워버렸나. 이듬해부터 한화의 성적은 조금씩 하락하기 시작했다. 나의 우상, 정민철이 일본으로 떠난다는 소식까지 들리면서 나의 관심은 야구가 아닌 축구, ‘2002년 월드컵’으로 향했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실컷 즐긴 뒤 상경한 대전 촌놈에게 서울은 말 그대로 ‘신세계’였다. 서울 생활을 즐기고, 군대를 다녀오는 동안 야구는, 한화는 더 멀어졌다. 그런데 그런 나의 전두엽을 확 깨운 선수가 등장하니 바로 2006년 프로야구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류현진이었다.
2006년 한국에는 두 ‘괴물’이 있었다. 하나는 송강호 배우가 열연을 펼쳐 천만 관중을 달성한 영화 <괴물>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한화의 ‘괴물’ 투수 류현진이었다. 데뷔 첫해부터 다승(18승), 평균자책점(2.23), 탈삼진(204개) 1위를 차지하며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한 그는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신인왕과 정규리그 MVP를 동시에 석권했다. 투수 골든글러브도 당연히 류현진의 몫이었다. 선배 구대성에게 물어보고 단 30분 만에 터득했다는 체인지업 스토리는 야구 만화 그 자체였다. 류현진이 등판하는 날이면 나는 자취방 TV 앞에 앉아 투구 하나하나를 숨죽이며 지켜봤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는 류현진과 달리 한화는 2006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끝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추락했다. 류현진 등판 날 가까스로 승리를 거둔 뒤 속절없이 4연패에 빠지기 일쑤였다. 인터넷에는 ‘승-패-패-패-패’ ‘소년 가장 류현진’ ‘현진아 어서 탈출해!’ 같은 조롱이 넘쳐났다.
2010년 취업 전선에 뛰어든 나는 11년 전 다짐을 실천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입사지원서에 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열심히 어필했고, 그해 가을 마침내 스포츠 기자가 됐다. 전국의 야구장, 특히 한밭야구장을 출입할 수 있는 ‘PRESS’ 비표를 받은 순간, 당장 대전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가을야구에 한화의 자리는 없었다. 극심한 부진 속에 2009년에 이어 2년 연속 꼴찌에 머물렀다.
본격적으로 현장 취재를 시작한 2011년. 토끼해를 맞아 나는 가장 먼저 ‘사심’을 채웠다. 토끼띠 스타 류현진의 인터뷰를 추진했고, 한화 구단에서 흔쾌히 받아줬다. (지금도 감사합니다) 류현진의 실물을 영접하는 순간 심장이 터질 뻔했지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담담하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류현진의 커리어와 팀 사정을 줄줄 꿰고 있는 초보 기자를 보면서 구단 홍보 팀장님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자 나는 인터뷰를 마친 뒤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한화는 2011년 한대화 감독이 ‘없는’ 전력으로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한화를 담당 구단으로 맡게 된 나는 데스크가 ‘그만 써도 된다’고 할 정도로 승리의 기쁨을 기사로 실컷 작성했다. SK(현 SSG) 김성근 감독이 ‘야신’으로 불리던 시절, 한대화 감독은 나를 포함한 언론과 팬들에 의해 ‘야왕(야구의 왕)’으로 추대됐다. 한 감독은 “이거 비꼬는 거 아녀?”라고 했지만 싫지 않은 모습이었고, 대전 출신답게 특유의 충청도식 해학으로 시즌 내내 명언을 쏟아냈다.
2012년 회사를 옮긴 뒤 나는 한화를 잠시 놓아주었다. 당시 팀장이 팬심(?)을 우려해서인지 다른 구단들의 담당 기자를 맡겼다. 그 덕분에 나는 ‘정신 건강’을 챙길 수 있었다. 미국 생활을 정리한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돌아왔지만 흥행에만 도움이 될 뿐이었다. 전력은 여전히 약했고, 한화는 걷잡을 수 없이 추락했다. 야수진은 실수를 연발하며 나의 뒷목을 잡게 했다. 이때 나온 류현진의 명언이 ‘수비를 믿고 던지면 안 돼’였으니, 당시 팬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해보시길.
2013년 ‘절대 에이스’ 류현진이 미국으로 떠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구단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선수 육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서산에 2군 구장을 조성한 데 이어 류현진이 포스팅으로 벌어준 200억원이 넘는 돈으로 국가대표 테이블세터 정근우와 이용규를 외부 FA로 영입했다. 그리고 새 사령탑으로 ‘우승 청부사’ 김응용 감독을 모셔왔는데, 냉정히 이 선택은 패착이었다. 일흔 넘은 노감독은 선수단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신생팀 NC에도 짓밟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무섭게 한화를 비판했다. 하지만 이듬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15년 ‘야신’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면서 한화는 이슈의 중심에 섰다. ‘단내 나는’ 스프링캠프 훈련부터 매일 한화 기사가 쏟아졌고, 나 역시 열심히 자판을 두드렸다. 매 경기 전력 승부로 이전 한화에서 볼 수 없었던 끈질긴 경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선수층이 워낙 약하다 보니 불꽃은 오래가지 못했다. 2015년 6위, 2016년 7위, 2017년엔 8위까지 추락했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은 2017년 여름 경질됐다. ‘야신’도 어쩔 수 없는 한화 야구였다.
이 시절부터 한화는 팀 성적보다 마케팅 측면이 더 부각됐다. 홈-원정을 가리지 않고 관중석을 꽉꽉 채우는 인기, ‘꿀잼’ 콘텐츠를 앞세워 KBO 10개 구단 가운데 최다 구독자를 자랑하는 유튜브 Eagles TV, 30만 농인을 위한 ‘야구 수어’ 창조까지. 그래서 누군가는 한화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야구 빼고 다 잘하는 구단.’
2017년 방송기자로 새 출발한 나는 ‘보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팬심’을 거둬들였다. 잘한 건 칭찬으로, 못한 건 매서운 비판으로 한 발 떨어져 한화를 평가했다. 물론 비판적인 뉴스가 8할 이상이었다. 외국인 선수는 데려오는 족족 부진했고, 걸출한 신인은 보기 힘들었다. 계속된 실패 속에 2020년엔 역대 최다 타이 기록인 ‘18연패의 수모’를 겪었다. 18연패를 탈출하던 날, 후배 기자가 보문산 정상에서 응원을 펼친 팬들을 취재해 뉴스를 제작했다. 내가 취재했다면 눈물의 리포트가 됐을지도 모른다. 2020~2022년까지 3년 연속 꼴찌. 최근 10년 동안 계약 기간을 채운 감독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한화의 암흑기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화 팬들은 끝까지 응원했다. 8회가 되면 이기든 지든 우렁찬 목소리로 ‘최강 한화’를 외쳤고, 팀이 지고 있어도 ‘나는 행복합니다. 한화라서 행복합니다’라고 노래를 불렀다. 몸에서 사리가 나올 정도로 인내심이 강하다고 해서 ‘보살 팬’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아마 나 역시 이때쯤 이미 보살이 돼가고 있었을 것이다. 기자로서의 중립을 지키기 위해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도 속으로, ‘오늘 졌으면 내일은 이기겠지’라는 마음으로 한화의 패배 소식을 전했다. 결혼 승낙을 위해 처음 처가 식구를 만나던 날, 처남은 내가 대전 사람, 한화 팬이라는 얘기를 듣고 “말로만 듣던 보살 팬이시군요”라며 나의 인내심을 인정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암흑의 기운이 지난해부터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구단 역대 최고 외국인 투수 폰세와 와이스, 지난해 돌아와 올해 한층 더 단단해진 영원한 에이스 류현진, 10년 대계를 책임질 문동주까지. 한화는 막강한 선발진을 앞세워 8월까지 선두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한 시즌 가장 많은 한화 뉴스를, 그것도 긍정적이고 기쁜 뉴스만 전하고 있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순간이 가장 기쁜 사람은, 44년 프로야구 팬이자, 이글스 원년팬인 나의 아버지다. 야구가 있는 날은 저녁 약속을 잡지 않고 본방 사수를 하시며, 한화가 승리한 날엔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새벽 2시까지 보고 주무신다. TV소리와 시끄러운 아버지의 추임새에 어머니는 올해부터 각방을 쓰고 계신다. 야구장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된 요즘, 아버지는 내년엔 반드시 시즌권을 사겠다며 돈을 모으고 계신다.
지금까지 나에게 6월 이후의 순위표는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매일 아침 순위표를 확인하고, 플러스로 점철된 승차마진을 보면서 배시시 웃고 있다. 자연스럽게 숨겨놓았던 ‘팬심’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원래 목표대로 가을야구만 해도 소원이 없을 거 같은데, 이렇게 된 거 한국시리즈로 직행하면 좋겠다는 위험한 생각마저 가끔 한다. 19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오른다면 전 경기 취재에 자원 등판할 각오가 되어 있다. 마음속으로 소리쳐 외쳐본다. ‘한화는 이제 야구도 잘한다!’
유병민은 SBS에서 야구와 배구, 탁구, 사격, E-스포츠를 담당하고 있다. 그라운드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고 싶어 스포츠 기자를 업으로 택했으며, 고향 팀 이글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언젠가 보도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유병민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CELEB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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