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러닝도 하고 연애도 하게 좀 내버려두세요
생각해 보라. 우리가 젊은 시절 얼마나 많은 민폐를 끼쳤거나 보며 자랐는지.
전체 페이지를 읽으시려면
회원가입 및 로그인을 해주세요!

패션쇼가 끝나고 며칠 뒤 뒤풀이가 있었다. 네이더스 대표가 말했다. 곧 데상트와 함께 러닝 컬렉션을 낼 예정이라고 했다. 함께 러닝을 할 사람들을 모집한다고 했다. 슬프게도 일정이 맞지 않았다. 다른 일반인 모델 멤버들이 땀에 흠뻑 젖은 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을 보며 부러움에 떨었다. 나도 달리고 싶었다. 아니다. 달리고 싶기만 한 건 아니다. 러닝 크루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달리기 모임을 뜻하는 러닝 크루라는 말은 올해부터 서울의 가장 힙한 액티비티가 됐다. 나는 마흔 후반의 늙은 힙스터다. 아직도 힙한 건 뭐든 다 해보고 싶다. 건강에도 좋다니 나무랄 데가 없다.
나무랄 데가 생겼다. 갑자기 모두가 러닝 크루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소셜미디어는 러닝 크루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민폐 크루라는 말이 생겼다. 대체 뭐가 민폐일까. 찾아봤다.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무리 지어 달리다 보니 일어나는 몇몇 소동이 있었다. 보행로를 점유하고 달리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지나치게 큰 소리로 외치는 구호에 놀랐다는 불만이 있었다. 신호 위반이 가끔 있다는 불만도 있었다. 그렇다고 무슨 사고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러닝 크루로 인해 생명을 위협하는 충돌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가장 흥미로운 민원은 “대규모로 뭉쳐 달려 시민들에게 신체적, 심리적 위협을 준다”는 것이었다. 위협이라니. 위협이라는 말은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실 러닝 크루 유행은 내가 지난 몇 년간 본 가장 멋진 힙질이다. 건강하고 싶은 힙스터들, 아니 시민들이 자력으로 만든 가장 건전한 문화적 운동이다. 이제 시작이니 조금 거슬리는 부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 서울에 러닝 크루라는 모임들이 이렇게 잔뜩 생긴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다. 아직은 모두에게 익숙하게 적용되는 규칙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다. 이를테면 등산을 한번 생각해보시라. 젊은이들이 등산을 힙한 운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온갖 불평들이 쏟아졌다. 젊은 애들이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산에 오른다며 한동안 ‘등산 민폐 빌런’ 리스트까지 만들어 소셜미디어로 조리돌림을 해댔다. 특히 ‘레깅스 입고 등산하는 여자들’에 대한 온갖 너저분한 표현들이 온갖 커뮤니티에 사진과 함께 돌아다녔다. 내 생각에 진정한 등산 빌런은 고고한 산림청으로 하여금 ‘국립공원 짝퉁부부 등산위장 섹스금지’라는 무시무시한 현수막을 걸게 만든 분들, 북한산 자락에서 소주 2병을 마시고 기어이 비봉을 오르다가 낙상해 소방 헬기를 출동케 하는 분들이지만, 세상은 레깅스 입은 젊은 여자들이 생애 처음으로 등산이라는 걸 하는 게 더 꼴 보기 싫은 모양이다.
내 생각에 러닝 크루에 쏟아지는 과도한 비난은 독서 모임에 쏟아지는 비난과 똑 닮았다. 트레바리는 한국에 독서 모임이라는 문화를 정착시켰다.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아도 한국인은 책을 읽지 않는다. 더럽게 안 읽는다. 내 책 판매량이 생각만큼 나오지 않아서 하는 불평은 아니다. 그러니 젊은 친구들로 하여금 돈을 지불하고 독후감을 써가며 책을 읽게 하는 모임이라는 건 얼마나 훌륭한가. 그것이 하나의 사업 모델로 승승장구한다는 사실은 압도적으로 훌륭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게든 불평할 거리를 찾아낸다. 그중 하나는 트레바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독서보다는 연애에 더 관심이 많다는 비아냥이었다. 덕분에 트레바리는 ‘듀오바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나는 트레바리를 듀오바리라 낮춰 부르는 사람들의 동기 중엔 질투라는 감정이 가장 강하게 작용한다고 확신한다. 독서든 달리기든 뭐든 젊은이들이 모여서 한다면 거기에는 당연히 아름다운 연애의 가능성이 넘칠 수밖에 없다. 좋아하는 책을 함께 읽고 토론을 하다 보면 눈이 맞을 수밖에 없다. 연애라는 게 어떻게 출발하던가. 육체적·정신적 매력을 동시에 느끼는 상대를 만나는 것에서부터 사랑이라는 감정은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선조들도 그랬다. 님도 보고 뽕도 딴다고 했다. 뽕잎 따서 누에 먹이 장만하는 동시에 사람들 눈을 피해 연인도 만난다는 속담이다. 일거양득이라는 소리다. 님도 보고 책도 보는 것 역시 일거양득이다. 트레바리가 싫은 당신은 책을 읽는 놈들도 꼴 보기 싫은데 책을 읽으며 연애를 하는 놈들은 더 꼴 보기 싫은 것이다. 방구석에서 게임만 하고 종일 소셜미디어만 붙들고 있는 당신에게 그들은 지나치게 지적으로 잘난 척을 하며 심지어 사랑까지 획득한 재수 없는 인싸들이다. 그러니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소리는 하나다. 저것들은 독서를 위해 모인 게 아니라 연애나 하려고 모였다는 불평이다.
러닝 크루에 쏟아지는 비판도 비슷한 결이다. 저것들은 건강을 위해 달리려고 모인 게 아니라 연애나 하려고 모였다는 농담이 SNL 콩트로도 등장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한 번도 달려본 적 없는 사람들이 온러닝이나 호카의 수십만 원짜리 러닝화를 신고 갑자기 한강변에 모여 달리는 이유가 오직 건강 때문이겠는가. 맞다. 뽐내고 싶어서다. 폼 나는 유행에 동참하고 싶어서다. 뽐도 좀 내고 폼 나는 연애도 하고 싶어서다.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오늘은 서울시가 나섰다. ‘길 막고 인증샷 찍는 ‘러닝 크루’에 시끌…서울시도 나섰다’라는 제목이 아찔하다. 이 사람들은 서울의 모 사립대학교에서 1년에 한 번 신촌과 안암동을 점령하고 벌이는 개판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길 정도를 막는 게 아니라 응원전을 벌이다 간판을 때려부수는 훌리건들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아니면, 이태원의 밤거리에서 술에 취한 채 택시를 잡겠다며 2차선까지 침범한 넥타이 아저씨를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술 마신 사람이 조금 못난 짓을 해도 용서한다. 좀 예쁜 사진을 찍어보겠다며 다른 사람들을 한참이나 기다리게 하는 사람도 용서한다. 그러나 감히 남녀가 어울려 도심을 뛰어? 인증샷을 찍어? 그건 서울시가 나서야 할 일인 것이다.
불과 2주 전 서울시는 출생률 반등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2년간 6조7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웬만한 대기업 그룹사 전체 매출의 재원을 투자하는 일보다 더 손쉬운 건 ‘자라니’와 ‘여왕벌 게임’의 비아냥으로 하락세의 길을 걷게 했던 자전거 동호회나 러닝 크루를 활성화하는 일일 수도 있다. 온 세상이 출산율 저하로 인한 한국의 미래를 근심하며 제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애도 좀 낳으라고 닦달을 하는 시대 아닌가. 지금 20~30대의 가장 큰 문제는 도무지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들이 연애 좀 하겠다고 한강변에 모여 구령 좀 외치며 달리다가 단체사진 좀 찍는 게 뭐 그리 꼴 보기 싫은 민폐인가 말이다. 그게 ‘위협’이라면 오늘도 내 아파트 입구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킥보드부터 금지해야 옳을 것이다.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킥보드는 정말로 본인에게 위험하고, 남들에게도 위협적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이거다. 오늘도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에 등산 모임과 러닝 크루와 독서 모임의 민폐 리스트를 만들어 공유하는 당신에게 필요한 건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올라라. 달려라. 읽어라. 그리고 연애도 좀 해라. 오르고 달리고 읽으면 사랑이 싹틀 것이다. 그러니 오르거나 달리거나 읽지도 않으면서 사랑도 하지 않을 당신은 잠시만 조용히 참아주자.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김도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WATCH
#워치스앤원더스, #반클리프아펠, #파네라이, #피아제, #에르메스, #샤넬, #까르띠에, #예거르쿨트르, #몽블랑, #불가리, #위블로, #프레드릭콘스탄트
이 기사도 흥미로우실 거예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는
에스콰이어의 최신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