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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O와 넷플릭스와 <삼체>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HBO와 넷플릭스와 <삼체>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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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HBO 맥스를 이미 보고 있는 몇몇 친구들을 알고 있다. 그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거만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싫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당신들의 거만함을 사랑한다. 한국에 좀처럼 입성하지 않는 플랫폼을 재빠르게 우회해 미리 접해야 직성이 풀리는 당신은 거만할 자격이 있다. 나는 지난 몇 년간 “SF 팬이라면서 아직도 <레이즈드 바이 울브스>를 안 봤다니 말이 돼?”라거나 “나는 <하우스 오브 드래곤>이 <왕좌의 게임>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해(정말?)”라거나 “<라스트 오브 어스>를 보지 않고서 2023년의 콘텐츠를 논할 순 없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꽤 겪었다. 거기에 뒤따르는 ‘니가 그러고도 영화평론가냐’라는 측은한 표정은 부아를 살짝 긁었다. 괜찮다. 나는 부아를 긁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부아를 긁혀야 뭐라도 더 챙겨 보기 마련이다. 1990년대 중순 어느 날 “아직도 장 뤼크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를 안 봤다고?”라는 말로 내 부아를 돋워 모든 고다르 영화를 챙겨 보게 한 그 친구야말로 내 영화 인생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부아가 끓은 나는 HBO 맥스를 포함한 거의 모든 OTT 플랫폼 인기 시리즈를 다 보고 말았다. 그리고 각각의 OTT 플랫폼이 내놓은 시리즈에도 개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충 개성을 한번 열거해보자. 디즈니 플러스는 기본적으로 가족 친화적이다. 애플티비플러스는 퀄리티에 모든 것을 건다. 장사 안 될 것 같은 우아한 시리즈도 중간에 내버리지 못하고 꾸역꾸역 만드는 뚝심이 있다. 그렇다. 애플티비플러스는 아직도 <파운데이션>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HBO 맥스는 어른들을 위한 OTT다. 아마존 프라임은 ‘니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봤어’에 가깝다. 넷플릭스는? 별로 특징이 없다. 당연한 일이다. 넷플릭스는 구독자 수에서 다른 플랫폼이 따라갈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매스-플랫폼이 되는 순간 개성은 버려야 한다. 개성을 버려야 더 많은 구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다. 다만 요즘은 모든 OTT 플랫폼이 넷플릭스를 닮아가려 애쓴다. HBO 맥스가 HBO라는 이름을 버리고 맥스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론칭한 것도 그 때문이다. ‘어른을 위한 시리즈’라는 HBO의 개성을 버려야 맥스는 비로소 맥스가 될 것이다.
넷플릭스의 <삼체>는 모든 플랫폼이 개성을 버리고 뒤섞이며 벌이고 있는 거대한 전쟁을 상징하는 시리즈다. 나는 넷플릭스가 HBO라는 이름을 정의 내린 <왕좌의 게임>을 만든 D&D(데이비드 베니오프와 D.B. 와이스)를 영입해 <삼체>를 만든다는 소식에 꽤 놀랐다. 류츠신의 원작도 D&D도 도무지 넷플릭스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탓이다. 중국 작가 류츠신의 <삼체>는 어른의 SF다. 누군가는 류츠신이 물리학적 규칙을 지나치게 제멋대로 썼다고 불평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체>는 과학이라는 토대를 바탕으로 논리를 풀어내는 ‘하드 SF’의 영역에 속한다. <스타워즈>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만드는 것과는 다른 영역이다. 진입장벽이 좀 높다는 이야기다. D&D 역시 광범위한 대중을 만족시킬 만큼 편안한 시리즈를 만드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래서 결과는? 나는 에피소드 5의 삼체 추종자들이 탄 배를 소탕하는 파나마 운하 작전을 보다가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이 나노 섬유에 의해 썰려 나가는 그 장면은 고어함의 정도가 보통 넷플릭스 시리즈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그건 정확하게 HBO적이었고 <왕좌의 게임>적이었다. <왕좌의 게임>에 ‘피의 결혼식’이 있었다면 <삼체>에는 ‘파나마 운하 작전’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넷플릭스가 샤이닝 보너스(몇 년간 다른 회사로 이직할 수 없게 묶어두기 위해 지불하는 계약금)까지 D&D에 아낌없이 투자하며 넷플릭스 역사상 최고 제작비를 들여 만든 하드 SF 모험담은 성공적인가? 일단은 실패다. 슬프지만 <삼체>는 넷플릭스의 다른 오리지널 대작과 비교하면 시청률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제작비 대비 시청률을 엄격하게 따지는 넷플릭스로서는 1주 차 시청자 수 1100만이라는 건 만족할 만한 수치가 아니다. 다들 알다시피 넷플릭스는 경제성이 낮은 시리즈는 과감하게 다음 시즌을 캔슬해버리는 것으로 악명 높다. 그들이 한국 시장에 왜 그렇게 공을 들이겠는가. 미국 시리즈 한 에피소드 만들 돈으로 10부작 시리즈를 만들어 엄청난 수익을 안겨줄 만큼 경제적인 협력사(라고 쓰고 ‘하청업체’라고 읽는다)이기 때문이다. 경제지 <포브스> 역시 “<삼체>의 미래는 안전하지 않다”고 얼마 전 보도했다. 문제는 시즌2에서 압도적으로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시리즈의 규모다. D&D는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만약 두 번째 시즌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면, (시리즈를 완성할) 꽤 좋은 위치에 있을 것 같다”고 아리송한 희망을 내보였다. 이런 인터뷰는 대개 제작사가 다음 시즌 투자를 망설이고 있을 때 나오는 법이다. 원작과 D&D의 팬인 나야 시즌2 제작을 간절히 바라지만 세상이 항상 우리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던가. 나는 아직도 데이비드 핀처의 <마인드 헌터> 시즌3을 캔슬한 넷플릭스에 옹졸한 분노가 남아 있다. 핀처는 넷플릭스가 “예산을 줄이거나 더 대중적으로 만들 수 없다면 이 시리즈를 계속 제작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통보를 ‘정중하게’ 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해고를 당해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정중하게 해고당한다고 기분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넷플릭스와 D&D는 잘못된 만남일지도 모른다. D&D는 자신들이 잘 해오던 것을 <삼체>에서 해냈다. <왕좌의 게임>과 마찬가지로 원전의 매운맛을 지나치게 제거하지 않거나 오히려 더 증폭시키면서 거대한 서사의 기반을 서서히 쌓아 올렸다. <왕좌의 게임> 시즌1은 회당 시청자가 200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시즌8의 회당 시청자는 1800만 명으로 뛰어올랐다. HBO는 좋은 작품에 시간을 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플랫폼이다. 넷플릭스는 참을성이 부족하다. 지나치게 넓은 대중을 겨냥하는 거대 제작사는 개성이 강한 크리에이터들을 품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몇 년간 넷플릭스의 인기 시리즈들이 대중성을 확보하고도 HBO의 <라스트 오브 어스>나 아마존 프라임의 <더 보이즈>처럼 시대를 정의하는 시리즈의 반열에는 좀처럼 오르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지난 몇 년간 한국 블록버스터들이 줄줄이 실패한 이유를 한번 떠올려보시라. CJ엔터테인먼트의 영화들은 20여 년간 한국 시장을 정복했지만 요즘은 영 맥을 못 추고 있다. 대중적인 성공을 위한 자체적인 공식에 지나치게 얽매인 탓이다. 쇼박스나 롯데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그들은 어느 정도 승부를 걸 줄 안다. <파묘>를 쇼박스가 아니라 CJ에서 만들었다면 주인공은 설경구에 김고은과 이도현 사이에는 러브 라인이 생겼을 거라는 짤이 도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지금 넷플릭스는 어느 정도는 CJ엔터테인먼트를 닮았다.
물론 모든 콘텐츠 제작사에는 균형이 필요하다. 개성이 강한 제작사는 시대적인 작품을 만들지언정 오래가지 못한다. 쿠엔틴 타란티노를 비롯한 놀라운 재능들을 품어내며 <펄프 픽션> <트레인스포팅> <킬 빌> 등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를 정의하는 걸작들을 만들어낸 미라맥스는 2010년에 문을 닫았다. 개성을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돈을 버는 영화를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1990년대 로맨틱 코미디 걸작들을 만들어낸 영국 영화사 워킹타이틀 역시 유니버설픽쳐스에 인수된 뒤 좀 더 확장성 있는 영화들을 만들어내다 개성이 죽었다. 물론 우리에게는 A24가 있다. 2012년에 설립된 이 회사는 <문라이트> <플로리다 프로젝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같은 작은 규모의 웰메이드 영화을 만들어내며 21세기의 미라맥스로 떠올랐다. 그들은 개성이 강한 신인을 발굴해 다른 제작사에서는 검토조차 하지 않을 시나리오에 투자하는 대담함이 있다. <에스콰이어>의 표지를 장식한 유태오의 주연작 <패스트 라이브즈> 역시 A24가 신인 감독에게 대담하게 투자해 뽑아낸 작품이다. 그러나 나는 요즘 그들이 만드는 영화의 패턴이 지나치게 읽히기 시작한 이후로 약간의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개성과 경제성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A24 역시 미라맥스처럼 과거의 빛나는 화석으로 남을 것이다. 주식에 장기 투자를 해야 한다면 A24보다야 역시 디즈니 아니겠는가.
마지막 질문은 이거다. 과연 넷플릭스는 <삼체> 시즌2를 제작할 것인가. 아니면 D&D는 정중한 거절을 뒤로하고 HBO 맥스로 건너가 <삼체>의 우주를 계속 빚어 올릴 것인가. 아니면 HBO라는 이름을 버리기로 작정한 ‘맥스’조차도 그들에게 정중한 거절을 보낼 것인가. 작가의 개성과 플랫폼의 대중성이 행복하게 결합하는 건 이다지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어쩌면 <삼체>의 미래에 OTT 플랫폼이라는 우주의 미래가 달린 걸지도 모른다.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 21> 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김도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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