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 뮤익이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
직접 보기 전엔 느낄 수 없다. 머리로 안다고 반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7월 13일까지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론 뮤익의 회고전에서 우리는 무엇을 감각할 수 있는지.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큐레이터 키아라 아그라디(Chiara Agradi), 론 뮤익 스튜디오 소속이자 이번 전시 협력 큐레이터 찰리 클라크(Charlie Clarke)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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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의 협력 큐레이터이자 론 뮤익 스튜디오의 어시스턴트인 찰리 클라크가 ‘Mass’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with Charlie Clarke
론 뮤익은 예전에 “인체 일부처럼 단편적인 형태는 조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반드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죠. 그런 점에서 저는 ‘Mass’가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전 이 작업이 신체의 일부인 두개골을 하나의 상징적 전체로 제시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론이 ‘Mass’에 등장하는 두개골에 대해 말한 것이 있습니다. ‘두개골이라는 것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이죠. 메멘토 모리와 바니타스 회화, 앤디 워홀과 데이미언 허스트의 두개골에 이르기까지, 두개골은 끊임없이 등장해왔습니다. 해적 이야기나 어린이 동화, 졸리 로저(해적기에 자주 쓰이는 상징)에도 쓰이고, 또 헤비메탈 같은 특정 음악 장르와도 깊은 연관이 있어 대중문화 속에서도 자주 등장하죠. 두개골은 그야말로 어디에나 있고, 그와 함께 상징적인 의미도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예술가들은 종종 두개골이 지닌 상징성을 포착해 그것을 작품에 활용하곤 합니다. 데이미언 허스트도 아마 그런 작가 중 한 명일 거예요. 하지만 론이 사용하는 두개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실제 두개골도, 기존 두개골을 본뜬 것도 아닙니다. 그는 이 두개골을 처음부터 손으로 직접 조각했죠. 그 두개골은 남성인지 여성인지, 현대의 것인지 고대의 것인지, 혹은 특정 인종이나 지역을 반영하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론은 의도적으로 그 형태를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특정 인물이나 특정 시대와 연결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죠. 그가 매료된 것은 상징으로서의 두개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오브제입니다. 그는 두개골을 일부러 상징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상징적인 의미들은 이미 그 안에 자연스럽게 내제되어 있으니까요. 대신 그는 두개골의 물리적인 존재감에 주목하게 합니다. 그러면 그 상징성은 자연스럽게 배경에서 울려 퍼지게 되죠. 관람객은 각자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요. 그는 어떤 해석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면 두개골마다 서로 확연히 다른 점들이 눈에 띄죠. 그 제작 과정과 이유가 궁금합니다.
론은 우선 하나의 두개골을 점토로 조각했습니다. 이후 그 조각을 바탕으로 몰드를 제작했죠. ‘Mass’에 등장하는 모든 두개골은 이 하나의 몰드에서 캐스팅된 것입니다. 즉 처음에는 모두 같은 형태로 출발했지만 그 후 변형을 더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 가지 모양의 치아를 따로 만들어 일부 두개골에는 나중에 덧붙였고요. 색상도 두 가지 톤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회색이 도는 베이지 톤이고 다른 하나는 좀 더 선명한 하얀색입니다. 전체의 약 4분의 3 정도가 베이지 톤이고, 나머지 4분의 1이 흰색이에요. 또한 그는 턱 부위와 같은 특정 부분을 깨뜨릴 수 있는 소재로 따로 캐스팅했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두개골에는 조금씩 다른 균열이 있어요. 특히 치아 주변이나 턱뼈 부분에서 그 차이가 두드러지죠. 어떤 두개골은 작은 뼛조각이 빠져 있기도 하고요. 이런 변형들은 캐스팅이 끝난 후에 의도적으로 더해진 것입니다. 이 작업의 핵심 개념은, 본질적으로 모든 두개골이 동일하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모두 머릿속에 두개골을 하나씩 가지고 있잖아요. 바로 그런 인간의 공통 기반을 말하는 거예요. 하지만 동시에 시각적으로는 반복을 피하기 위해, 각 두개골에 미묘한 차이를 두었습니다. 각각은 분명 개별적인 존재지만, 진짜 중요한 건 그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일한 공간 안에 모여 있는 그 ‘무리’로서의 존재감이 이 작품이 만들어내는 경험의 핵심이죠. 론은 시각예술가이기 때문에, 그의 조각에 담긴 모든 요소는 시각적으로, 그리고 아주 직접적으로 전달됩니다. 그것이 언어로 번역되어 이해되는 방식이 아니라, 순전히 시각적인 경험을 통해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거죠. 두개골은 어떤 ‘의미’를 품기보다 ‘어떻게 보이는가’, 즉 시각적인 대상으로 다뤄지고 있어요. 두개골들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혹은 전부 같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만약 전부 다 다르면 너무 무작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고, 전부 같으면 보는 데 지루해질 수 있겠죠. 하나의 거대한 방 안에 설치된 대형 작품인 ‘Mass’를 경험할 때 우리는 시각적으로 그것과 상호 작용하게 됩니다. 눈은 계속해서 움직이면서 작품을 탐색하죠. 눈은 뇌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얼굴을 인식하는 데 굉장히 민감하거든요. 한번 어떤 것을 얼굴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그건 ‘얼굴이 아니다’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 돼요. 예를 들어 건물에 있는 창문 두 개가 눈처럼 보이고 그 아래 문이 코처럼 보이면 그걸 볼 때마다 자꾸 얼굴을 떠올리게 되죠.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언가에서 얼굴을 찾는 데 아주 능숙합니다. 이 설치 작업을 눈으로 따라가며 살펴보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곳저곳을 오가고, 비슷한 요소들을 잡아냅니다. 무의식적으로 흰 두개골들을 인지하게 되죠. 그 두개골들은 전체 공간 속에 흩어져 배치되어 있는데, ‘아, 저기 또 하나 있네’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하진 않지만, 눈은 그 차이를 감지합니다. 그 차이는 아주 미묘해서 무의식적으로 인식되지만, 그만큼 관람객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이끌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Dead Man’ ‘Big Man’ 등의 사실성을 띤 작품들에서 두개골을 오브제로 다룬 ‘Mass’와 ‘Dead Weight’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어떤 중요한 변화가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 사이에 마스크 작업 작품들도 있었죠.
마스크들은 하나의 연작이라기보다는 각각 완전히 독립된 작품이에요. 우연히 모두 '마스크'라는 형식을 하고 있을 뿐, 론은 이들을 하나의 세트로 보지 않았습니다. 각각을 하나의 고유한 조각으로 간주했죠.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론은 단편적인 형태를 조각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Mask II’는 잘려 나간 머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마스크’입니다. 관람자가 “몸통은 어디 있지?” “이건 어디서 잘린 걸까?” 같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죠. ‘Mass’는 호주의 빅토리아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Victoria)에서 론에게 작업을 의뢰하면서 시작된 작품입니다. 미술관 측은 그에게 기존보다 훨씬 더 크고, 규모 있는 작업을 제안했죠. 꼭 ‘더 큰 조각’을 원했다기보다는 그의 작업실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 개별 조각이라는 범주를 넘어선 무언가를 상상해보길 바랐던 거예요. “만약 상상력을 완전히 놓아버린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라는 질문이 출발점이었습니다. 그가 무엇을 만들어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고, 실제로 결과가 지금의 ‘Mass’일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아마 사람들은 그가 여러 인물을 조각하거나, 기존보다 좀 더 많은 인물을 모은 ‘군중’의 형태를 만들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론은 이 기회를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였고, 그야말로 틀 밖에서 생각해 전혀 새로운 방식에 도전했죠. 되돌아보면, ‘Mass’는 겉보기만큼 ‘완전히 다른’ 작업은 아닐지도 몰라요. 어떤 의미에서는 Mass 역시 그동안의 작업들과 깊이 이어져 있어요. 론의 조각은 결코 고립된 채로 존재하지 않거든요. 언제나 그 조각이 놓인 ‘공간 안’에서만 비로소 존재하게 됩니다. 론 뮤익의 작품들은 특정한 크기의 방에 설치하라는 식의 지침서를 동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공간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들은 항상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관람객이 방 안으로 들어와 그 작업과 마주하는 순간, 그 공간 전체가 하나의 설치가 되는 것이지요. 주변의 벽, 공간의 여백, 그런 모든 요소가 작품의 일부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Mass’는 그가 해온 작업들과 본질적으로 결이 아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론의 작업을 보면, 관람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그 시선을 밀어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 둘 사이에서 아주 이상한 긴장감이 형성되죠. 전 초대하면서도 저항하는, 그런 긴장감이 생기는 이유가 얼굴 표정에 있다고 생각해요. 인물들이 하나같이 고통이나 좌절 속에 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까요. 모델 없이 작업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런 표정이 전달하는 감정도 설계되는 건가요?
론의 모든 조각은 오로지 손으로 직접 만들어집니다. 점토 한 덩어리에서 시작해 형태를 만들어가죠. 예를 들어 ‘Young Couple’에 나오는 여자 인물을 작업할 때, 론은 얼굴을 한 번 만들고는, 엄지손가락으로 그걸 지워버리고 다시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냅니다. 이건 전통적인 조각가들이 인체를 다루는 방식과도 닮았어요. 물론 가끔은 모델을 참고하기도 합니다. 잘 알려진 예로 ‘Big Man’은 실제 모델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에요. 당시 모델 한 명을 작업실로 초대해 자세를 취하게 했는데, 론이 원한 포즈가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모델은 결국 구석에 앉아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 순간 론이 말했죠. “바로 저거야. 뭔가 있어. 그게 좋다. 저걸 하자.” ‘Pregnant Woman’을 작업할 때도 모델을 초대했어요. 하지만 결국 그의 조각은 특정 인물의 초상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을 만들겠다’라고 정해두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많은 예술가나 조각가가 그러하듯, 그는 조각을 하며 그 인물을 ‘찾아가는’ 방식을 선택하죠. 표현하고 싶은 감정은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그게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지는 직접 만들어보면서 발견해야 하죠. 참고할 만한 시각적 자료는 주변에 넘쳐납니다. 책, 인터넷, 거리의 사람들까지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조각이라는 그 행위 자체를 통해서만 진짜 인물을 발견해냅니다. 작품 속 인물들 중 많은 수가 벌거벗은 상태로 표현되어 있어요. 그런 모습은 인물을 더 취약하게 보이게 하죠. 이처럼 인물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하는 의도는 뭘까요? 음, 제가 론을 대신해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제게는 옷을 입은 인물이든, 벌거벗은 인물이든 기본적으로는 똑같이 작동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다만 제 느낌에 옷을 입은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옷이 ‘장소감’을 준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어 ‘Woman With Shopping’을 보면, 그 인물이 분명 ‘지금 시대’에 속해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만약 고대의 인물이었다면 플라스틱 봉지를 들고 있거나, 재단된 코트를 입고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그 옷이 그녀를 오늘날의 거리 위에 위치시키는 거예요. 반면에 다른 인물들은 더 모호한 경우도 있어요. ‘Chicken / Man’, 그러니까 테이블 앞에 앉은 남자의 경우에는, 가구나 속옷 같은 요소들이 특정한 시대감을 불러일으키죠. 하지만 인물이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라면, 그가 어떤 시대의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사라집니다. 오늘날의 인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Man in a Boat’처럼요. 이 작품 속 인물은, 관람객이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마다 매번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평소엔 줄무늬 양복을 입고 일하는 회계사였는데, 지금은 자신의 취약성에 대한 불안한 꿈에 빠져 있는 걸지도 모르죠. 혹은 신화 속 인물처럼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는 존재, 저승으로 향하는 물 위를 지나고 있는 누군가일 수도 있고요. 만약 그 인물이 옷을 입고 있었다면, 이런 다양한 해석은 훨씬 좁아졌을 겁니다. 반면에 ‘Woman with Sticks’의 경우는 훨씬 더 열린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어요. 그래서 관람객이 이런 인물들을 보다 꿈같은 존재, 신화적이거나 동화 같은 인물로 받아들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죠. ‘지금-여기’라는 일상적 현실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상징적인 존재처럼 느껴지니까요.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의 큐레이터인 키아라 아그라디가 ‘Mass’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with Chiara Agradi
앞선 두 도시에서 전시가 열렸을 때의 반응이 궁금해요.
예상하셨겠지만, 론 뮤익의 작업에 대한 비평가들과 대중의 반응은 언제나 뜨겁습니다. 이번 서울 전시는 새로운 구성으로 기획되었지만, 그 출발점은 파리의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에서 열린 전시와 밀라노의 트리엔날레 전시였고, 이 두 도시 모두에서 반응은 매우 열광적이었습니다. 파리에서 열린 2023년 전시는 특히 의미가 깊었습니다. 정확히 10주년은 아니었지만, 2013년 파리에서 열린 론 뮤익의 전시가 그의 경력에서 아주 중요한 전시 중 하나로 평가받았기 때문에, 10년 만에 다시 그의 작업을 소개한다는 데에 기대가 컸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전시의 큰 성공으로 이어졌어요. 무엇보다도 그 전시에서는 ‘Mass’가 호주 외 지역에서 처음으로 공개되기도 했고요. ‘Mass’는 공간과 능동적으로 ‘대화’하는 조각입니다. 전시 장소에 따라 매번 새롭게 구성되어야 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파리 전시에서는 유리로 둘러싸인 라스파이 거리의 재단 건물과 외부 환경, 자연광이 어우러지며 매우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이 전시는 론 뮤익이 최근 어떻게 조각 작업의 접근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Mass’는 그의 새로운 조각의 방향성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전시 전체가 그의 최근 작업 흐름에 집중하는 기회가 되었죠. 파리 전시는 이후 2023년 12월, 밀라노로 이어졌습니다. 밀라노에서는 1930년대에 지어진 역사적 건물에서 전시가 열렸는데, 파리의 현대적 유리 건축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고, ‘Mass’ 역시 그 공간에 맞춰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현되었습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서울 전시가 파리와 밀라노 전시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각 도시의 공간과 맥락에 따라 전시가 매번 새롭게 재구성되고 재해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시는 단순한 순회 전시라기보다 각 장소마다 고유한 경험을 만들어내는 훨씬 더 복합적이고 유연한 프로젝트입니다.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과 론 뮤익 스튜디오가 세 번째 도시로 서울을 택한 계기는 뭐였나요?
국립현대미술관(MMCA)의 제안 덕분이죠. 먼저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저희는 그 제안을 매우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어요. 저희 재단은 비록 파리에 물리적인 공간을 두고는 있지만, 아시다시피 강력한 국제적 프로그램을 운영 중입니다. 재단의 활동은 본질적으로 전 세계 미술계와 협응하고 있습니다. 해외의 공공기관과 협업하는 일은 재단에게 언제나 깊이 있는 교류이자 매우 풍요로운 기회입니다. 특히 이번 국립현대미술관과의 협업은 론 뮤익의 작업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 해석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었던 아주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전시가 서울에서, 그리고 아시아에서 열리는 론 뮤익의 첫 대규모 회고전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현지 큐레이터 팀과 함께 작업하며, 한국적 맥락 속에서 론 뮤익의 작업을 어떻게 새롭게 읽고 제안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고 탐색한 과정은 저희에게도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은 론 뮤익의 오랜 후원자이자 지지자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잘 알려져 있듯이, 론 뮤익은 1990년대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이후 ‘YBA’)라는 범주와 자주 연관되어 온 작가입니다. 그는 1997년, 찰스 사치 컬렉션을 기반으로 한 전시 <Sensation>에 참여하면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죠. YBA 작가들은 흔히 충격을 주는 전술적 접근, 도발적인 주제, 비전통적인 재료 사용 등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이러한 재료에 대한 개방성은 오늘날까지도 론 뮤익의 예술 실천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YBA 세대의 다른 작가들과 비교해보면, 론 뮤익의 작업 여정은 훨씬 더 개인적이고 내밀한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적극적으로 좇지 않았고, YBA 현상의 고조된 에너지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작업을 이어왔죠. YBA가 런던과 사치, 그 세대의 작가들을 담론의 중심에 올려놓으며 서구 미술사 속에서 특정한 장을 형성했다면, 론 뮤익은 결국 그 맥락을 넘어선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현대 인체 조각(figurative sculpture)을 근본적으로 갱신한 작가이며, 그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입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 조각’과도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론 뮤익은 전통적인 의미의 하이퍼리얼리스트가 아니에요. 그가 구사하는 정교한 기술과 장인정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훨씬 더 깊은 감정과 사유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의 조각은 심리적이고, 인간적이며, 감정적으로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런 점에서 론 뮤익의 접근은 정말 유일무이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디지털화되고, 덧없고, 피상적인 것이 점점 더 만연한 시대에서 그가 고수하는 ‘물성’과 ‘전통 조각’에 대한 헌신은 그 자체로 매우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극사실주의 작가로 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전시를 직접 보시면 바로 느끼시겠지만, 론 뮤익의 조각은 대부분 아주 크거나 아주 작습니다. 말 그대로 ‘실물 크기’인 작품은 하나도 없어요. 처음에는 실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시간을 들여 바라볼수록 이 조각들이 현실이라기보다는 꿈속에서 마주친 어떤 이미지에 더 가깝다는 걸 점점 느끼게 됩니다. 물론 디테일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고, 표면은 극사실적으로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조각이 전달하는 메시지나 전체적인 존재감은 전혀 ‘하이퍼리얼리즘’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5m 크기의 여성을 본 적이 있나요? 저는 론 뮤익의 작업이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가, 우리의 잠재의식과 꿈의 감각을 건드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모든 게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져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게 실제로 내가 경험했던 것과는 또 정확히 일치하지 않고요. 분명 인간의 얼굴이긴 한데, 크기나 맥락이 어딘가 왜곡돼 있어서 이상하게 낯설고, 조금은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요. 그의 유명한 대형 얼굴 조각(‘MASK II’)을 생각해보면 그 크기 자체도 인상적이지만, 불편함을 유발하는 건 단지 크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얼굴을 바라보지만, 그 위에 무엇이 있는지, 아래에 어떤 몸이 연결되어 있는지, 주변의 맥락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어요. 그런 그의 작업에는 단순히 ‘하이퍼리얼리즘’으로 묶을 수 없는 훨씬 더 깊은 층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작품을 어떻게 보면 좋을까요? 또 어떤 반응을 예상하나요?
론 뮤익의 조각을 온라인상의 이미지나 프린트된 사진으로 접해보신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그러나 그의 작업을 실제로 마주하는 경험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아마도 대개 충격이나 경외감이에요.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스케일의 차이가 있을 거라고는 쉽게 예상하지 못할 거거든요.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실제로 눈앞에서 마주하는 건 완전히 다른 감각이니까요. 특히 이번에 선보이는 ‘Mass’는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규모 자체도 거대하지만,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의 공간을 위해 새롭게 구성된 방식은 정말 강렬해요. 거의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쌓아 올린 거대한 두개골의 벽은 보는 이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길 것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홍이지 학예사와 찰리도 공감하는 하나의 팁을 드릴게요. 론 뮤익의 조각은 일종의 ‘열린 질문’으로 작동해요.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수많은 질문이 시작되죠. “이건 뭐지?” “왜 이런 모습일까?” “나한테 이건 무슨 의미일까?”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기대하지는 않으셨으면 해요. 그 질문들엔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건 괜찮은 거예요. 그의 작업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은 질문을 계속해서 불러일으키는, 끝없이 열려 있는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준다는 점이거든요.
이번에 파리의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이 새로운 곳으로 이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은 새로운 장을 맞이하고 있어요. 새로운 시작이자 또 하나의 도전이죠. 파리 팔레루아얄 광장(Place du Palais-Royal)에 위치한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 2025년 10월에 개관할 예정입니다. 현재 라스파이 거리에 있는 기존의 재단 건물을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가 장 누벨(Jean Nouvel)이 다시 한번 설계를 맡았어요. 하지만 규모가 더 크고, 건축적으로도 지금과는 매우 다른 형태가 될 예정입다. 무엇보다도 이 새로운 공간은 파리 도심 한가운데,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하게 되기 때문에 도시 맥락과의 관계와 파리라는 도시의 리듬과의 상호작용 역시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번 변화는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에 매우 흥미롭고 의미 있는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에서 레이몽 드파르동의 대형 회고전, 트리엔날레 밀라노에서 열린 <시아모 포레스타 (Siamo Foresta)> 등의 기획을 맡아오며 어떤 점을 느꼈는지 궁금해요.
‘시아모 포레스타 (Siamo Foresta)’는 이탈리아어로 ‘우리는 숲이다’라는 뜻이에요. 브라질 출신의 원주민과 비주민 예술가 27명이 참여했죠. 밀라노 관객들에게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이 오랫동안 탐구해온 주요 주제, 특히 현대미술 속에서 원주민의 목소리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가에 대해 깊이 있게 소개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죠. 레이몽 드파르동(Raymond Depardon)의 회고전은 밀라노에서 열린 뒤에 상하이의 파워스테이션 오브 아트에서도 선보였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드파르동이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촬영한 사진 시리즈를 중심으로 구성해, 현지 관람객들과 자연스러운 문화적 공명을 이끌어내고자 했습니다. 반면 상하이에서는 전혀 다른 주제를 택했습니다. 드파르동의 작업 중 ‘현대 농촌의 삶’을 조명하는 측면에 초점을 맞췄고, 특히 젊은 중국 관객들과 강한 정서적 연결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상하이처럼 밀도가 높은 초도시적 공간에서 수많은 젊은 관람객이 이 조용하고 비판적인 농촌 다큐멘터리에 깊이 감동하고 몰입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Credit
- ART DESIGNER 최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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