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D
대체 커피가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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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피를 찾아 커피 산지를 돌아다닌다. 그게 일이다. 좋은 커피를 구하기 위해 커피 생산 국가의 수확 일정에 맞춰 방문한다. 어떤 물건이든, 최상품은 일찌감치 동나기 마련이니까. 올해는 인도를 시작으로 중미의 여러 국가를 거쳐 페루와 콜롬비아를 찾았다. 이번 에티오피아 일정까지 합치면 석 달 정도가 걸렸다. 업무상 출장이긴 하나 커피 농장을 방문하고, 제각기 다른 경치를 바라보며 생산자를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는 특별한 감흥이 있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농장에서 내어주는 투박한 커피 한 잔은 그 지역을 기억하는 매개체가 된다. 오늘 같은 저녁이면 낮에 마셨던 커피들을 떠올려본다.
첫 번째 커피는 동트기 전, 호텔 식당에서 만났다. 눈을 뜨면 무조건 커피를 마셔야 하는 사람에겐 지나치게 끔찍한 퀄리티의 커피가 나왔다. 곰팡내가 심해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다. 에티오피아는 커피 생산량에서 아프리카 1위, 전 세계 6위를 차지하는 국가다. 게다가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이 많은 생산량의 절반을 내수로 소비할 만큼 커피를 사랑한다. 이 나라에서는 커피 파는 노점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앉아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에티오피아에서 늘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땅한 수출품이 없는 에티오피아에서 커피는 주요한 달러 수입원이다. 그러다 보니 국가의 엄격한 통제를 받아, 품질이 좋지 않아 외국에 수출하지 못하는 커피만 국내에서 유통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전 세계인을 매혹시킬 만큼 멋진 커피를 생산하는 ‘커피의 기원’임에도 로컬 커피의 맛이 떨어진다. 잔을 내려놓으니 막 해가 뜨려고 했다. 농장으로 이동해야 할 시간이었다.
에티오피아 내에서 품질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바로 커피 농장일 것이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손님이 오면 커피부터 준비하는데, 모든 과정은 재래식으로 이뤄진다. 철판 위에 생두를 올려 로스팅하고, 절구에 찧어 가루를 낸 뒤, ‘제베나’라고 부르는 주전자 모양 도기에 넣고 끓이는 식이다. 완성된 커피는 다 같이 둘러앉아 마시면 된다.
첫 번째로 도착한 농가 한편에서는 인센스를 피우고 있었다. 청량한 송진 향이 나는 가운데, 에스프레소처럼 진하고 묵직하게 내려진 재래식 커피의 맛은 훌륭했다. 농밀한 단맛과 초콜릿 맛, 기분 좋은 은은한 산미가 긴 여운으로 남았다. 올해 커피는 품질이 꽤 괜찮을 것 같다는 기대가 밀려왔다. 아침에 제대로 커피를 마시지 못한 아쉬움까지 더해 연거푸 석 잔을 들이켜자 3시간 넘게 비포장도로를 달려온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농장에서는 유독 하늘이 가깝고 푸르게 보였다. 실제 농장의 고도는 2300m나 된다. 15년 전까지만 해도 추워서 커피를 키울 수 없는 곳이었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커피 농장의 고도가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다. 커피는 재배 고도가 높아 일교차가 클수록 품질이 높아진다. 온난화는 커피를 점점 더 높은 곳으로, 혹은 낭떠러지 끝으로 밀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씁쓸한 생각을 하며 다음 농장으로 이동했다.
험악한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동네의 소규모 생산자들도 함께 모인 자리였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꼭 방문하고 싶은 농장이 생겼다. 농장 관계자는 얼마 전 내린 폭우 때문에 길이 좋지 않아 차는 올라갈 수가 없지만, 오토바이로는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와이 낫? 급하게 동네 오토바이를 수배해 진흙탕 길을 한참 달렸다. 예정에 없던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또 다른 커피 대접을 받았다. 배전도를 조금 약하게 해서인지, 예가체프 특유의 플로럴하고 풍부한 과일의 산미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달고나 같은 쌉쌀한 단맛이 입안에서 피어났고 뒤이어 날숨을 타고 그윽한 커피콩 본연의 향이 실려 나왔다. 밤이 깊어서야 허름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피곤한 하루였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식당 한구석에 있는 무언가가 눈길을 끌었다. 30년은 너끈히 됐을 법한 에스프레소 기계였다.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나다. 에스프레소를 발명한 이탈리아 레시피에 따라 설탕을 듬뿍 넣고 살짝 저어 들이켰다. 뜨거운 용액이 기도를 타고 내려가자 입안에는 비터스위트한 향미가 차올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잔 아래 고인 커피를 머금은 설탕을 떠먹었다. 달콤한 메이플 시럽의 맛에 미소가 지어졌다.
처음 에티오피아에 왔을 때, 도시는 물론 꽤 한적한 시골 동네의 카페에서도 에스프레소 기계를 접할 수 있어 신기했다. 에티오피아는 1930년대 후반, 무솔리니가 집권하는 이탈리아로부터 5년간 식민 지배를 받았다. 어찌 보면 짧다고 할 수 있는 기간 동안 에티오피아에는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 문화가 깊게 자리 잡았다. 먹고 마시는 행위는 생명에 관계된 지혜이자 지역별 특성에 맞게 오랜 시간에 걸쳐 자리 잡은 문화라 쉽게 바뀌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커피만큼은 예외인 것 같아 흥미롭다.
하루의 여정을 끝낼 때면 종종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진다. 대체 커피란 무엇이길래 나는 이렇게 매년 전 세계 커피 산지를 돌아다니며 불도 잘 들어오지 않는 숙소에서 침침한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가. 거기에는 생존을 위한 직업 세계의 논리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에티오피아 외에 커피 문화가 제대로 뿌리내린 나라가 또 하나 있다. 바로 한국이다. 1860년 프랑스 신부가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으니 나름 오래전부터 커피를 마신 셈이나, 당시에는 매우 값비싸 주로 상류층만 향유했다. 커피의 본격적인 대중화는 에티오피아와 같이 식민 지배기에 이뤄졌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오랫동안 인스턴트 커피가 문화의 중심에 있었고, 1999년 이후로는 스타벅스의 흥행과 함께 원두커피 붐이 일었다. 이런 분위기가 사그라들기도 전에 ‘스페셜티 커피’가 들어왔다. 지금은 수많은 커피 애호가들이 자신의 취향에 맞춰 다양한 원두를 골라 배전도를 따져가며 즐긴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급속한 경제성장만큼이나 한국의 커피 문화와 시장도 유례가 없을 만큼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압축 성장한 것이다. ‘국뽕’ 없이 얘기하더라도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품질 좋고 다양한 스페셜티 커피를 쉽게 즐길 수 있는 곳이 한국이지 않을까. 치열한 경쟁 속에서 커피를 로스팅하고 추출한 커피인들의 노력과 활동은 빠른 기술의 발전을 불러왔고, 차별화를 원하는 수천 개의 로스터들과 이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백 곳의 생두 수입업체가 만들어낸 재료 선택의 다양성은 좋은 품질의 커피를 위한 기름진 토양이 되었다. 비싸지만 특별한 스페셜티 커피를 경험하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소비자까지, 모든 것이 시너지 효과를 내며 한국 커피 문화 발전을 이뤄왔을 것이다. 왜 한국은 이리도 빨리 커피 문화의 발전을 이뤄냈을까? 대체 커피는 어떻게 이렇게 수많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가.
과거를 가장 풍부하게 기억하는 것은 후각이라고 했다. 20여 년 전, 커피 일을 처음 시작한 곳은 안암동에 위치한 핸드드립 전문점이었다. 많은 손님이 메뉴를 대충 훑어보곤 “안 시고 맛있는 걸로 주세요”라고 주문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신맛이 가장 많이 나는 예가체프를 내어드리곤 했다. 흥미롭게도 시지 않은 걸 찾았던 대부분의 손님은 신맛이 나는 예가체프를 마시고 흡족해했다. 말로는 답할 수 없다. 다만, 싫어하는 마음마저 녹여버리는 제대로 된 예가체프의 향이 내가 가진 의문의 많은 점을 설명해줄지도 모르겠다.
서필훈은 커피 리브레의 대표다. 책 <커피를 좋아하면 생기는 일>을 썼다.
Credit
- EDITOR 김현유
- WRITER 서필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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