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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커 저지가 탄생시킨 기록들

에스콰이어가 들려주는 패션 아이템의 비하인드 스토리, 사커 저지 편.

프로필 by 이하민 2025.05.27

SOCCER JERSEY 저지(Jersey)는 양모로 짠 니트 원단을 수출하던 영국의 저지섬(Jersey Island)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처음에는 가볍고 유연하며 땀도 잘 마르는 저지섬식 원단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1896년 제1회 올림픽이 열리던 당시 자전거 경기복에 이 원단이 사용되며 운동복을 통칭하는 단어가 됐다. 그리고 스포츠 시장이 호황기를 누리던 20세기 중반, 축구라는 스포츠가 큰 사랑을 받기 시작하며 사커 저지는 영향력 있는 패션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화제의 유니폼 각 팀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담긴 디자인과 운동복 특유의 선명하고 화려한 컬러감. 사커 저지의 세계는 립스틱 컬러만큼이나 다채롭고 광범위하다. 19세기 중반부터 2025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팀의 유니폼이 나타나고 사라지길 반복한 만큼 호평받은 디자인도 있지만, ‘역대 최악’이라는 평을 받은 유니폼도 많다. 예컨대, 레크레아티보 데 우엘바의 2012/2013 시즌 땡땡이 저지는 경기복이라기엔 다소 우스꽝스러워, 경기 시청을 포기한 팬들까지 생겼을 정도. 두 눈을 의심하게 하는 디자인도 있다. 스페인 프로축구 4부 리그의 C.D. 팔렌시아는 만화 <진격의 거인>을 연상케 하는 인간의 근육과 뼈가 그려진 인체 해부도를 새겼고, 이 충격적인 디자인은 바로 카파가 제작했다. 또 1994년 성조기에서 착안해 상의 전면에 별무늬를 새긴 미국 대표팀의 유니폼은 지금 보면 빈티지한 멋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지나친 애국심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고. 반면 독특한 유니폼으로 이목을 끈 구단도 있다. 페루의 축구 클럽 Club Deportivo Los Diablos Azules가 그 주인공이다. 애니메이션 <드래곤볼> 속 사이어인 캐릭터에서 영감받아 갑옷 그래픽을 그려 넣은 그들의 저지는 작은 구단의 유니폼임에도 페루 축구 팬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사커 저지의 가치 사커 저지는 필드를 누비는 선수들에게도, 수많은 축구 팬에게도 그 의미가 특별하다. 축구에 대한 애정과 취향을 직관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니까. 그래서인지 레전드로 꼽히는 유니폼의 가치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때도 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마라도나가 입은 르꼬끄 저지는 경매에서 무려 714만 파운드, 한화로 100억원이 넘는 금액에 낙찰되며 스포츠 기념품 중 최고가를 기록했다. 전설적인 인물과 상징적인 경기 덕분이기도 했지만, 오직 디자인만으로 주목받은 사례도 있다. 나이키가 디자인한 2018년 나이지리아 대표팀 유니폼은 선명한 그린 컬러와 독수리를 연상케 하는 지그재그 패턴이 특징으로, 출시 3시간 만에 매장 완판, 온라인에서는 단 3분 만에 품절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패션이 된 유니폼 선수들의 피, 땀, 눈물이 깃든 경기와 스포츠맨십으로 가치를 입증한 이 컬트적인 아이템은 축구 팬들뿐 아니라 수많은 셀럽에게도 사랑받았다. 에이셉 라키는 뮤직비디오 <RIOT>에서 ‘HUMANRIGHTS 2022’라는 문구가 새겨진 엄브로 저지를,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는 2014년 거버너스 볼 뮤직 페스티벌에서 자신의 브랜드 골프왕(Golf Wang) 저지를 착용해 이목을 끌었다. 사커 저지의 유행 앞에서는 성별도 중요하지 않다. 타미 힐피거의 오버사이즈 저지를 원피스처럼 소화했던 벨라 하디드는 풋볼 티를 다채롭게 활용하기로 유명하고, 빈티지 유니폼에 시스루 스커트를 매치한 리한나의 임산부 룩은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빌리 아일리시는 여자 축구의 성장을 응원하며 블리처 리포트(Bleacher Report)와 협업해 직접 사커 저지를 제작했다. 셀럽들의 애정에 힘입어 이제 축구 유니폼, 사커 저지는 명백한 패션 아이템이 됐다.

재해석된 오리지널 2020년 초반 스멀스멀 올라온 Y2K의 유행에 힘입어 사커 저지는 블록코어(Blockecore)라는 이름의 트렌드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아워글래스 셰이프로 운동복에 대한 편견을 깬 마린세르×나이키 협업 풋볼 티는 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매물이 거래되는 레전드 피스가 됐고, 발렌시아가는 2022년부터 아디다스와 협업한 오버사이즈 저지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최근 아크네 스튜디오는 스포츠 브랜드 카파와 협업해 레트로 사커 저지에서 영감받은 캡슐 컬렉션을 출시했다. 그중에서도 브랜드 특유의 핑크 컬러와 그래픽으로 개성을 드러낸 티셔츠는 출시 전부터 패션 신의 주목을 받았다. 사커 저지를 이야기할 때 마틴 로즈에 대한 언급을 빼놓으면 서운하다. 트위스트한 듯 마구 비틀기도, 딱 달라붙게 만들기도, 허리 위에서 댕강 자르기도 하며 저지를 잘 갖고 놀기로 유명하니까. 브랜드마다 사커 저지를 제안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루이 비통은 파리 올림픽을 기념하며 포멀한 슈트 팬츠와 매치한 룩을 제안했고, 프로토타입스@prototypes.ch는 저지 위에 시스루 톱을 레이어링하거나 얼굴에 뒤집어쓰는 참신한 스타일링을 선보였다.

HOW TO 블록코어를 해석하는 핵심은 꾸민듯 안 꾸민 듯 무심한 태도다. 비비드한 컬러의 오버사이즈 사커 저지에 펑퍼짐한 핏의 팬츠나 버뮤다 팬츠를 매치하고 적당히 낡은 듯한 스니커즈를 툭 신는다. 두툼한 삭스도 빼놓지 말 것. 새롭게 출시되는 현행 아이템을 구매해도 좋지만, 빈티지 제품을 디깅하는 것도 사커 저지를 입는 또 하나의 재미다. 100개가 넘는 국가대표 팀과 각종 사커 팀에서 시즌마다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인 만큼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커 저지가 있으니까. 오직 사커 저지만 판매하는 숍도 많다. 무려 140만 팔로워를 자랑하는 @classicfootballshirts는 국가, 시즌, 리그, 선수별로 나뉘어 있어 취향에 따라 구매 가능하며 @classicsoccerjerseys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빈티지한 모델의 다양한 정보를 볼 수 있다.

Credit

  • ASSISTANT 송정현
  •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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