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프리즈 아트 위크의 기억 (2) 예술은 이야기의 환생_박세회
아트 위크가 지난 후 미술 전문가들이 남긴 3장의 사진과 사연.
전체 페이지를 읽으시려면
회원가입 및 로그인을 해주세요!

지난 4일 바라캇 컨템퍼러리에서 열린 로렌스 아부함단의 퍼포먼스.
writer 박세회
8월 말부터 9월 5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밤에는 파티에서 스파클링와인을 마시고, 낮에는 미술 전시를 보거나 미술 작가를 인터뷰하러 다녔다. 광주비엔날레의 개막식이 있었던 9월 6일에는 눈이 침침했고, 숨에서는 술에서 덜 깬 옅은 비린내가 났다. 며칠 동안 하루에 2만 보가 넘게 걸어온 탓에 종아리 근육은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아트 기자들은 비엔날레에서 쉬고 싶을 때면 검은 천을 찾곤 한다. 암막이 드리워진 부스 안에 들어가 작품을 감상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엉덩이를 붙이고 잠시라도 쉬며 다리를 주무르려는 것이다. 의자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의 메인 전시장에서 신하오 청의 비디오 작품 ‘지층과 표식’이 상영 중인 방을 찾은 이유기도 하다.
내가 들어갔을 때 프로젝터가 전사되고 있는 화면 안에선 한 남자가 챙이 긴 버킷 해트를 쓰고 기차가 다니는 구름다리 아래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잘 들리진 않았지만, 돌 구르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걸었고, 걸었고, 계속 걸었다. 자세히 보니 남자는 돌을 차며 걷고 있었다. 뭔가를 반복하는 행위를 볼 때면 나는 치성을 떠올리곤 한다. 수고와 정성을 들여 하지 않아도 문제없을 행위를 복잡하고 어렵게 치러내는 과정이 자신이 바라는 소원의 대가가 될 거라는 믿음 말이다. 꽤 오랜 시간 그 남자의 돌차기를 감상한 뒤에야 나는 내 옆에 앉은 남자가 화면 속에 있는 그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제 고향은 중국 남서부에 있는 윈난성이에요. 윈난성에는 수도인 쿤밍시부터 버마(미얀마)의 라시오 시까지 이어지는 오랜 도로가 있지요. 저는 그 길을 따라 돌을 차며 걸었어요. 저 돌이 구르는 소리를 들으면서요. 그 도로에는 여러 층위가 있지요. 그 도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전쟁을 치르던 중국이 버마에서 물자를 들여오기 위해 건설한 도로지만, 그 아래에는 2000년 동안 말을 타고 다니던 옛 도로가 숨어 있어요.” 그 얘기를 듣고 나는 얼마나 먼 길을 걸었느냐고 물었다. “41일 동안 900km가량을 걸었어요.” 신하오 청이 말했다. 화면에 드리워진 뜨거운 햇살을 다시 보자 그의 말이 아찔하게 들렸다. 화려하지 않은 화면의 배경에서 문득 이렇게 굴곡도 정처도 없는 이야기와 맞닥뜨리는 순간 우리는 무방비가 되곤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프리즈 전시관을 돌다 파란 방에서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조각과 매우 비슷한 형태의 작품을 만났다. 나뿐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말했다. “뭐야? 칼더야?”라는 말에서 기시감이 들었다. 지난 7월 바르셀로나에 출장을 갔다가 잠시 시간이 남아 후안 미로 미술관에 들른 적이 있다. 당시 후안 미로 미술관에서는 후안 미로 미술상을 받은 작가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거기서도 나는 똑같은 생각을 했다. “뭐야? 칼더야?” 나는 그때 브로슈어를 보고 알았다. 그 작가의 이름이 투안 안드루 응우옌이라는 것. 이후엔 이런 것도 알게 됐다. 그가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남베트남 군인의 아들이며, 그래서 아주 어릴 때 베트남을 떠나야 했다는 것. 또 그의 모빌들이 미군이 베트남전쟁 때 사용했던 포탄의 잔해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도. 그의 또 다른 작품 ‘The Unburied Sounds of a Troubled Horizon’은 중부 베트남의 꽝찌(Quang Tri) 지역의 슬픈 역사를 배경으로 제작한 픽션 영상이다. 이 영상에 등장하는 여성은 땅에 파묻힌 포탄에서 금속을 채집하고 그걸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종종 그 금속들로 미국의 아티스트 칼더와 비슷한 형태의 모빌이나 조각을 만든다. 투안의 영상에서 그녀는 칼더가 자신이 태어난 해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어쩌면 칼더의 환생인지도 모를 그녀가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서 지금 당장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포탄에서 금속을 긁어내며 생활공예를 하고 있다는 상상은 투안이 자신의 작품을 위해 꾸며낸 이야기의 세계인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라오스와 베트남의 일부 마을에서는 미군이 투하했으나 터지지 않고 파묻힌 포탄들로 숟가락 따위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5월에 만난 태국의 아티스트 프랏차야 핀통은 라오스의 나피아 마을 사람들이 모은 집속 포탄에서 채집한 금속을 활용해 자신의 조각을 캐스팅하거나 연마한다.
삼청 나이트로 북촌 일대가 떠들썩했던 4일 밤, 바라캇 컨템퍼러리의 작은 전시실에는 조용한 열기가 가득 차 있었다. 바라캇 컨템퍼러리의 전시 ‘로렌스 아부 함단: 지프자파’로 한국을 찾은 로렌스 아부 함단의 에세이 낭독 라이브가 열렸기 때문이다. 로렌스의 에세이 낭독은 윤회와 환생을 믿는 드루즈교만이 가진 ‘나타크’라는 개념을 설명하며 시작했다. 아랍어 ‘나타크’의 원래 의미는 ‘발화’를 뜻하지만, 드루즈교도들이 사용하는 이 단어의 뜻은 조금 다르다. 나타크는 ‘전생의 발화’ 혹은 ‘발화된 전생’을 뜻한다. 즉 드루즈교를 믿는 사람이 ‘나타크’를 한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전생을 기억해 그 기억들을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마치 우리말에서 ‘방언’은 다른 지역의 언어를 뜻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신의 강림으로 모국어가 아닌 말로 기도하게 되는 상태’라는 다른 뜻으로 쓰이는 것과 비슷하다. 로렌스 아부 함단의 나타크 강연을 들은 날, 하필 그날 베트남 시골 마을의 한 여성으로 환생한 칼더의 포탄 금속 조각 작품을 프리즈에서 만난 것은 먼 곳의 이야기들이 한 곳으로 꼬물꼬물거리며 모여드는 유기체적 필연처럼 느껴졌다. 41일 동안 900km를 걸은 신하오 청의 행위가 오랜 도로의 이야기를 되살려내려는 기도처럼 다가왔다.
who's the writer?
박세회는 <에스콰이어> 코리아의 피처 디렉터로 와인과 위스키 그리고 현대미술을 취재한다.
Credit
- ART DESIGNER 김동희
CELEBRITY
#로몬, #차정우, #노재원, #진영, #A20, #솔로지옥, #tws, #카이, #kai, #아이브, #가을, #필릭스
이 기사도 흥미로우실 거예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는
에스콰이어의 최신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