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의 쇼케이스 안 풍경. ‘빈티지 워치’ 범주의 시계들은 미감 면에서 현재 판매되는 시계들과 차이가 있으며, 특히 케이스 크기가 지금보다 훨씬 작았기에 외관에서부터 구별된다.
서울 종로구 인의동에 자리한 세운스퀘어는 명실공히 국내 최대 규모의 시계 상가다. 귀금속, 가전 상가를 포함해 약 700여 개의 매장이 한 건물 안에 자리 잡고 있어, 1층 중앙 난간에 올라 굽어보면 장관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많은 시계와 보석을 누가 다 사나 할 정도로 무수한 매대가 광활한 공간에 빽빽이 들어차 있으니까. 그리고 정말 이걸 누가 다 살까 싶을 정도로 손님이 없으니까. 얼마 전에 방문할 때 놀라운 점을 하나 더 발견했다. 빈티지 워치에 대한 기사를 기획하며 실물이라도 둘러보고자 들른 것이었는데, 그 무수한 시계들 속에서도 빈티지 워치를 두루 훓는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묻고 물어 오래된 시계를 많이 다룬다는 2층 맨 끝 구석의 매장까지 찾아갔으나 해당 매장에서도 딱히 보여줄 만한 물건은 없다고 했다. ‘아주 오래된’ 건 맞지만 가치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시계들만 구경할 수 있었을 뿐. 시계를 고치고 있던 사장은 느릿느릿 걸어 나오며 설명 반 한숨 반 섞인 어투로 말했다. “그 분야는 돈이 안 돼요. 그것만 다뤄서는 쉽지가 않죠.” 의아한 이야기였다. 빈티지 워치는 최근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판매를 시작할 만큼 각광받고 있는 분야 아니었던가? 빈티지 워치 브랜드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돈이 되는 분야라면 누구보다 빠른 백화점들이 그들과 협업 행사를 여는 건 다 뭐였단 말인가? “일단은 그때 시계를 구하는 게 쉽지가 않아요. 생각해봐요. 1950, 1960년대에 국내에서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됐겠어요?” 사장의 답이었다.
본격적으로 기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용어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컨드 핸즈’ ‘빈티지’ ‘앤티크’ 같은 표현을 혼재해 쓰는 경향이 있지만, 시계 분야에서는 특히 어떤 표현을 쓰는가에 따라 지시하는 물건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빈티지 워치라고 하면 보통은 회중시계가 손목시계로 넘어오면서 불안정했던 기술이 점차 안정되고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시계를 말해요. 제조 기술이라든가 가치에 좀 더 중심을 두고 구분하는 표현인 거죠.”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 송인준 대표의 설명이다. 부산 중앙동에 자리한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은 2004년부터 현재까지 성업 중인 빈티지 워치 전문 브랜드다. 국내에서 해당 영역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시피 한 시절부터 빈티지 워치에 깊이 관심을 가져왔다는 뜻이다. “물론 시계라는 물건은 1800년대부터 있었죠. 저는 개인적으로 1800년대 물건들은 ‘뮤지엄 피스’, 그 이후부터 1950년대 이전까지의 시계를 ‘앤티크’라고 부르고 있어요. 반대로 1990년대 이후, 현재 나오는 시계와 외형적으로 닮은 범주의 물건은 중고, 세컨드 핸즈라고 불러야 의미가 맞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물론 이런 식의 구분은 사전적 개념이라기보다 시계 애호가들 사이의 규정과 이해에 가깝기 때문에 정보를 공유하는 집단에 따라 이해가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M워치의 이태주 대표는 192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나온 것들을 빈티지 워치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공정을 수작업하던 시대의 시계들은 현재의 시계와 좀 다른 분과였다는 동일한 발상에서 출발하지만, 쿼츠 시계(기존의 태엽 구동 대신 수정진동자 고유의 성질을 이용해 전지로 작동하도록 한 시계)의 등장과 그것이 시장에 끼친 영향을 주요 변곡점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는 세이코가 쿼츠 시계를 내놓은 196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 무렵까지 나온 제품은 최근 쓰이기 시작한 신조어인 ‘네오 빈티지’라는 표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빈티지 워치는 돈이 안 된다’고 했던 세운스퀘어 시계방 사장님의 말에 숨은 비밀도 그의 설명 안에서 찾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시대에 나왔다고 해서 모두 빈티지 워치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예요. 그 시대에 나온 귀한 시계도 많지만, 사실 잡스러운 물건도 엄청나게 많으니까요.”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에서 빈티지 롤렉스 데이데이트 모델을 시착해보는 중인 에디터.
부산 중앙동에 자리한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은 2004년부터 현재까지 성업 중인 빈티지 워치 전문 브랜드다.
애초에 빈티지 워치에 대한 규정이 왜 필요하냐고 의아해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최근 중고 시계가 각광받는 건 모델의 희소성으로 인해 ‘투자 상품’으로서 입지가 강해진 경향으로 볼 수 있는데, 빈티지 시계를 둘러싼 문화는 아직은 그런 ‘환금성’ 논리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 같은 매장에서 빈티지 워치들로 구성된 장식장을 보면 이런 구분이 꽤나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당시 시계들은 우리가 아는 일반적 범주의 중고 시계와 좀 다른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디자인 발상부터 세월이 덧입힌 고유의 오라까지. 가장 극명한 차이는 크기다. 요즘은 남성용 시계로 케이스 직경 38~40mm 정도를 가장 선호하지만 빈티지 워치는 대부분 30mm 초중반대 크기이며 그만큼 두께도 얇다. 시계라는 물건을 바라보는 미감과 인식 자체가 지금과는 달랐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회중시계를 들고 다니다가 1920~1930년대쯤 손목시계로 넘어왔잖아요. 회중시계는 전반적으로 큰데, 그걸 손목에 찰 수 있도록 줄여야 했죠. 작고, 정교하고, 내구성이 강한 완벽한 메커니즘으로. 1920년대부터 그런 노력을 하다가 1950년대쯤 돼서야 30mm 초반대까지 줄어들었어요. 그런데 작게 만들면서 자꾸 문제가 생기니까 1960년대까지는 계속 그 에러를 줄이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고요. 가볍고 내구성이 좋은 소재가 나오고, 경제적인 부품이 개발되고, 계속 거기에 따른 연구 개발과 새로운 시도를 해온 거예요. 사이즈를 줄이면서 얼마나 안정화를 시키는가에 거의 모든 브랜드가 집중한 시대였던 거죠.”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 송인준 대표의 설명이다. 오늘날 시계가 커진 이유에 대해서도 견해가 다양하다. 사람들이 옷을 입는 방식의 변화와도 관계가 있을 테고, 어쩌면 손목시계라는 물건에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라는 정체성이 옅어지며 장신구의 역할이 강조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테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빈티지 워치의 크기가 작다는 것은 단순히 외관상의 색다른 미감 이상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그건 기술력의 징표다. 송인준 대표의 표현을 빌리면, “사실상 시계의 기술적 발전은 그 시대에 거의 끝났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력 말이다.
빈티지 워치의 특징을 설명 중인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의 송인준 대표.
한 빈티지 시계 애호가의 비약적 발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런 인식은 송인준 대표만의 생각이 아니다. M워치 이태주 대표 역시 해당 시대의 시계의 기술적 완성도에 주목할 부분이 있다고 믿는 사람 중 한 명이다.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나온 시계 중에 명기가 많죠. 사실 그때 나온 것들이 데커레이션이나 기계적 성능이 제일 좋아요. 인건비가 싸서 기계보다 사람 손으로 거의 다 했던 시대이니까.” 이태주 대표는 원래 디자이너로 일하다 기계식 시계에 빠져 전직한 후 20년 넘게 시계 수리 일을 해온 기술자로, 현재는 시계 애호가들 사이에서 ‘오버홀(분해 점검) 장인’으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고객의 시계를 점검하고 수리하는 업무 외에 오래도록 이어져온 개인 프로젝트도 하나 있으니, 바로 본인의 마음에 꼭 들어맞는 커스텀 시계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시계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보며 시계 메커니즘의 가장 좋은 부분들만 추려 하나의 시계를 구성하고자 하는 꿈을 품었고, 15년 전 시작돼 여러 번 멈췄다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한 작업은 이제 거의 완성 국면에 다다랐다. 재미있는 점은 그 속을 채운 것이 1940년대에 생산된 바쉐론 콘스탄틴 무브먼트고, 케이스는 1950년대에 유행했던 파텍필립 칼라트라바 케이스를 모티브로 했으며, 선반으로 직접 부품을 조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최신 기종 시계부터 앤티크 워치까지 폭넓게 다루는 기술자고 M워치는 공식 서비스센터에서 쓰는 고가의 장비를 두루 갖춘 수리업체지만, 그가 보기에는 그것들이 가장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제가 그 시대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하고 싶었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에요. 그냥 제 시계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던 건데 요소들을 선택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예요. 기능으로 따지면 물론 최신 시계들이 더 좋죠. 하지만 시계 성능 측면, 마감, 데커레이션 같은 부분은 그때의 시계들도 굉장히 좋거든요. 무엇보다 설비가 없던 시대에 사람들이 앉아서 일일이 깎듯이 만들었으니 기계를 들여다보면 정감이 가는 부분이 있어요. 부품의 오차 같은 측면도 당연히 기계로 깎아서 부품을 만드는 현행품이 더 낫다고 해야 할 텐데, 그런데 저도 부품을 만들다 보면 제가 선반 작업으로 하는 게 기계보다 좀 더 ‘정밀하다’는 느낌이 들곤 하거든요. 기계가 오차 없이 깎아내는 것보다 제가 세밀하게 힘을 주고 속도를 조절해 부품을 만드는 게 오히려 더 정확하다는 느낌이 드는 거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수치상으로는 분명 정확한데,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삐뚤어 보이는 그런 부분들. 수치와 인식 사이에 미세한 차이가 있다면 손으로 하는 작업에서는 그걸 충족할 수가 있는 거죠.”
M워치 이태주 대표는 그간 자신이 본 시계의 메커니즘 중 가장 좋은 부분만 추려 커스텀 시계를 만드는 개인 작업을 하고 있으며, 현재 해당 시계에는 1940년대에 생산된 바쉐론 콘스탄틴 무브먼트가 들어가 있다.
이태주 대표의 시선에는 확실히 최근 들어 빈티지 워치 시장이 활기를 띠는 부분이 있다. 일단 유명 시계 브랜드들이 자사의 옛 모델들을 재해석한 제품을 내놓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흐름이다. 빈티지 워치를 구매하려는 사람들 중에는 물론 기성 워치 컬렉터들이 빈티지 영역까지 손을 뻗치는 경우도 많겠지만, 시계와는 큰 상관이 없었던 일반 고객들도 해당 시대 특유의 디자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증표라는 것이다. “요즘 시계 디자인이 너무 현대적이고 모던해지니까 반대급부로 옛날 디자인을 찾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거겠죠. 크기 측면에서도 요즘 다시 또 작은 시계가 유행이기도 하고요.” 브랜드 시계를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방편으로 빈티지 워치에 주목하는 경향이나 스트리트와 럭셔리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패션 풍조 역시 빈티지 워치의 인기에 일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 정도의 이해를 갖고 이 분야에 발을 들인다면 큰 손해를 보기 십상이다. 빈티지 워치는 아무리 잘 만들었다 한들 이미 50년 넘게 살아온 ‘고령’의 기계이고, 생활 방수조차 되지 않는 것들이 많으며, 대부분의 경우 어떤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어떻게 관리되어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시장에서 빈티지 워치가 팔리는 가장 큰 영역은 판매 목적인 것 같아요. 이베이 같은 데에서 시계를 사고 리페어해서 당근마켓이나 번개장터에 올리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그게 뭐 사업자등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용돈벌이 하는 거예요.” 이태주 대표가 안타까워하는 국내 중고 시계 시장의 특성 중 하나는 바로 그런 부분, 이상하리만큼 직거래가 발달했다는 부분이다. 대부분의 거래가 숍의 중개를 통해 성사되는 해외에 비해 효율적인 부분은 있지만, 반면 시계를 망쳐버리기에 너무 좋은 환경이다. 시계가 발매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된 제품인지, 어떤 부분이 재생을 거쳤는지, 혹시나 외관만 그럴싸하고 안에 다른 게 든 건 아닌지 여부는 개인이 판별하기에 쉽지 않은 부분이다. 그리고 판별을 포기하고 느슨한 신뢰로 시계를 거래할 때 시장은 조금씩 더 불투명해진다.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 송인준 대표가 최근 인터넷 쇼핑몰 같은 비전문적 플랫폼에서 빈티지 워치를 팔기 시작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국내에는 특히 소비 문화에서 그런 흐름이 많았던 것 같아요. 뭐가 유행이라고 하면 우르르 몰려갔다가 그만큼의 깊이나 전문성이 없이 운영되니까 금방 꺼져버리는 거요. 그러니까 시계를 판매하는 사람들이 좀 더 책임감을 갖고 공부하고, 복원이나 수리 측면에서 완벽주의를 추구해야 하죠. 빈티지 워치는 그렇게 유행처럼 사라져버릴 분야가 아니니까. 완벽주의는 정말 많은 시간적, 물리적, 금전적 손해를 필요로 하잖아요. 일단 그런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봐요.”
‘오버홀 장인’ 이태주 대표가 운영하고 있는 종로구 청진동의 시계 수리점 M워치.
시계는 가히 인류 수공예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분야 중 하나다. 종류가 무수하고 많은 부품이 들어가며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완벽’이라는 기준도 사람마다 다르다. 모든 것이 출시 그대로의 상태여야 정품이라 말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빈티지 워치는 부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좀 더 느슨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처럼 결벽에 가까운 정품 기준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이얼에 색상을 입히는 수준의 커스텀은 용인하는 (그 역시 정품 다이얼과 브랜드의 정식 절차 및 약품을 기반으로 깐깐하게 진행한다) 경우도 있는데, 물론 그런 기조에 대한 반대 견해 역시 존재한다. 그렇기에 중고 시계, 특히 빈티지 워치 분야에서 믿을 만한 구매처와 수리업체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어떤 관리를 거쳐 내 손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시계는 이 수리점 저 수리점을 떠돌며 제각각의 기준에 따라 크게 흔들렸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M워치 이태주 대표가 “사실 시계는 다 기술자가 망치는 것”이라고 하는 것도,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의 송인준 대표가 인하우스 기술자들을 보유한 자사의 구조와 그들의 전문성을 계속 강조하는 것도 동일한 이유다. 모델마다 모두 다른 매뉴얼이 존재하고 새로운 요소가 등장할 때마다 교육을 하는 브랜드 공식 센터에 비하면 사설 수리점의 경우는 특정 모델에 대한 이해가 낮아 본인이 갖고 있는 지식 안에서 응용력을 발휘해 손을 보는 경우도 많다. 그건 송인준 대표와 이태주 대표 두 사람의 공통된 견해였는데, 두 사람 모두 그 대목에서 ‘예지동’이라는 지명을 꺼냈다. 예지동 시계골목은 한때 국내에서 가장 큰 시계 판매 클러스터이자 전국의 고장 난 시계가 모이는 일종의 ‘시계 종합병원’ 역할을 한 곳이다. 국내 1세대 시계 기술자들의 집결지이자 요람이었달까. 점점 쇠락하던 골목은 결국 작년 종로 재개발 계획으로 사라졌고, 상인들과 기술자들은 세운스퀘어를 비롯해 곳곳으로 흩어졌다. 예지동 시계골목은 없어졌어도 전국의 시계 판매 업체들은 여전히 이 기술자들에게 시계 수리를 맡기고 있고, 최근에 밝혀졌듯 심지어 시계 브랜드들도 빈티지 워치처럼 자사 공식 서비스센터에서 파악하기 힘든 기종은 암암리에 예지동 기술자들에게 문의하는 판국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기사에서 취재한 모든 이가 입을 모아 예지동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했다. 길어야 5년, 이 기술자들이 모두 은퇴하는 시점이 오면 국내 시계업계는 분명 다소간의 혼란과 침체를 겪을 거라고. 하지만 예지동의 많은 기술자가 ‘장인정신’보다는 ‘생계’에 주안점을 두고 일하면서 건강하지 못한 시계 문화를 존속시켜 왔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했다. “사실 그분들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죠. 그냥 ‘싸게’ ‘빠르게’가 가장 중요하고 디테일은 어떻게 해도 영업이 되는 환경이었을 테니까요. 매번 ‘사장님 이거 급해요 모레까지 해주세요’라 요구하고 시계를 돌려주면 제대로 확인도 안 한다고 가정할 때, 기술자가 완벽성을 추구할 수 있겠어요? 그냥 ‘폴리싱했네’ ‘깨끗하네’ ‘됐네’ 하게 되는 거죠.” 송인준 대표의 설명이다. 그가 상정한 환경은 분명 빈티지 워치 문화가 정착하기에 특히 더 힘든 부분이 있을 듯했다. 면과 면이 만나는 지점에서 어떤 앵글을 만들어야 하는지, 특정 포인트의 굴곡에서 어떤 미감을 의도했는지, 그런 우아함과 세심함이 중요한 분야인데, 초심자들은 아무 데에서나 시계를 구매했다가 그런 디테일이 삭았거나 번쩍번쩍하게 깎인 ‘낡은 시계’를 받고 실망하기 일쑤일 테니까 말이다.
하이엔드 시계 거래 플랫폼 바이버의 쇼룸에 전시된 중고 시계들.
분야를 막론하고 중고 명품 거래 플랫폼이 세계적으로 큰 각광을 받고 있음에도 유독 시계 분야에서 시동이 늦어 보였던 것도 시계의 이런 특성 때문이다. 검수가 까다롭고 그 검수에 대한 신뢰성을 담보하기도 어려우니까. 두나무가 출범한 하이엔드 시계 거래 플랫폼 바이버가 이런 상황에서 택한 전략은, 강력한 엔지니어 팀이었다. 이들은 지금도 주요 시계 브랜드 출신의 기술자들을 영입하는 데에 큰 투자를 감행하고 있다. 각 브랜드의 매뉴얼을 습득하고 지속적으로 노하우를 공유해 어떤 시계가 들어오든 내부에서 감정이나 오버홀, 수리, 폴리싱, 복원까지 모든 대응이 가능한 플랫폼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어떤 공정 때문이든 시계가 한번 외주 업체로 나가면 사실 그 과정을 모니터링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지거든요.” 바이버 문제연 대표의 설명이다. 바이버는 현재 다양한 브랜드 출신의 엔지니어들로 구성된 ‘바이버랩스’를 기반으로 ‘가품일 시 300% 보상’이라는 파격적 보증 시스템을 내걸고 있다. 그럼 바이버는 빈티지 워치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사실 관련이 없다. 바이버에 취재 요청을 한 건 그래서였다. 이런 시스템을 바탕으로 빼어난 80, 90년대 시계 컬렉션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1970년대 이전 제품을 다루지 않는 이유를 묻기 위해서. 문제연 대표는 단순히 그렇게 오래된 매물이 아직 들어오지 않은 문제라고 했다. 매물만 들어온다면 얼마든지 다룰 의향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 한편으로는 그게 굉장히 어려운 도전이라는 것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롤렉스만 봐도, 특정 모델이 나오면 그 모델의 부품을 생산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어요. 그럼 빈티지 워치 모델의 경우에는 부품 확보가 어려운 거죠. 만약 교체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저희도 빈티지 모델을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10년, 15년 본사에서 일한 엔지니어들도 그렇게 오래된 모델을 고쳐본 경험은 많지 않다고 하기도 하고요.” 부품 측면에서나 수리 노하우 측면에서나 어려움이 있다는 뜻이다. 바이버랩스의 엔지니어인 에단은 기준의 모호성을 또 하나의 난관으로 꼽았다. “시계의 역사는 계속 새로운 소재나 구조가 발명되면서 내구성을 높여온 거잖아요. 바꿔 말하면, 옛날 시계는 내구성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 있다는 뜻이겠죠. 현재 생산되는 모델들은 메탈 밴드를 보통 통으로 찍어내기 때문에 링크가 늘어나지 않아요. 하지만 1940년대에 만든 시계는 쇠를 구부리고 펴면서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 보면 링크들이 하나하나 다 벌어져 있거든요. 그럼 거기에서 개념 정리가 필요한 거예요. 기술자는 새로운 쇠를 만들어 넣어 그 부분을 고치는 게 맞을까요? 그렇게 고쳐서 더 나아질 수는 있겠지만, 그건 정품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시계 문화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플랫폼을 지향하는 바이버는 쇼룸에 주요 시계 모델을 시대별로 전시해두고 있어 디테일 변화를 구경할 수 있다.
시계 문화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플랫폼을 지향하는 바이버는 오늘날 손목시계의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빈티지 워치까지 폭넓게 다루고자 하는 비전을 갖고 있다. 하지만 빈티지 워치는 바이버처럼 단호한 신뢰성을 필요로 하는 플랫폼이 다루기엔 너무 복잡하고 모호한 분야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이다. 바이버 전략기획팀의 사무엘은 꼭 빈티지 워치 ‘실물’을 다루는 게 아니라 ‘콘텐츠’를 다루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설명했다. 바이버는 단순히 시계 판매의 중개 역할만 하는 것을 넘어 <바이버 매거진> 같은 매체를 만들어 시계 문화의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사실 그의 관점에서는 국내에 빈티지 문화가 자리 잡을 만한 기반 자체가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빈티지라고 하면 뭔가가 축적된 걸 향유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국내에 롤렉스가 처음 진출한 게 2002년이에요. 일본에는 1950년대에 진출했죠. 그건 그 시계들이 출시됐을 때 시계를 계속 판매했다는 뜻이고, 그 세월 동안 쌓인 게 있을 거라는 뜻이죠. 그런데 정작 일본에도 빈티지 워치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어요. 1990년대 들어서야 부흥을 하기 시작했으니까. 빈티지 워치에 먼저 주목한 나라들이 눈독을 들이면서 국내의 경우에는 그나마 있던 물건들도 다 해외로 빠져나갔고요. 어느 정도 거래되는 유통량이 있고, 그게 계속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고 경험하면서 지식이 전달되고, 발전하고, 그렇게 쌓여가는 거잖아요. 그 관점으로 보자면 국내는 빈티지 워치의 저변이 너무 약하죠.”
M워치 이태주 대표 역시 국내에는 빈티지 워치에 대한 기반이 부족하다는 인식에 동의했다. 해외에서 열리는 큰 시계 행사에 가면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옷을 수선해 입는다거나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시계를 차는 식으로 ‘스토리’ 측면에서 빈티지 문화를 향유하는 분위기를 볼 수 있는데, 국내에는 그런 문화가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빈티지 워치도 유독 브랜드 네임과 희귀 매물에 집착하는 경향을 띨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만약 주변에 빈티지 워치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딱히 말릴 생각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추천해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현행 제품을 샀다가 유행이 지나서 금방 질리는 것보다 관리가 어렵고 좀 부담스러운 제품을 사서 아껴 차는 게 나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빈티지 워치를 모으는 친구들을 보면 정말 그걸 생명처럼 여기는 태도가 보이거든요. 꾸며주고, 만져주고, 어디가 안 좋아 보이면 치료해주기도 하고요. 관심 없다는데 자꾸 이거 멋있지 않냐고 자랑을 해대기도 하죠.”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의 송인준 대표가 든 건 또 다른 비유였다. 미술 작품. 빈티지 워치를 사는 건 미술 작품을 들이는 것과 비슷한 감흥이 있는 것 같다는 뜻이었다. “빈티지 워치도 물론 공장에서 만든 물건이죠. 하지만 공산품과 작품, 두 영역으로 나눠 봤을 때 저는 후자에 더 가깝다고 느끼거든요. 유통 마진 구조에서 어떻게 손익을 계산해서 제작했는가 하는 부분보다 예술성, 창조성, 창의성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그때는 시계의 많은 부분을 사람의 손으로 만들기도 했고요. 예술 작품처럼 어떤 복원 단계를 거치고, 어떻게 소개되는지가 정말 중요한 분야이기도 하죠. 그래서 이제 저희 같은 업체들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주요 시계 브랜드 출신 기술자로 구축되어 시계의 감정부터 수리까지 내부에서 원스톱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한 바이버의 ‘바이버랩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