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런의 '오디세이'와 잭 크레거의 '레지던트 이블'이 보여준 각색의 정답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디세이'와 잭 크레거의 '레지던트 이블'을 둘러싼 원작팬 논란은, 좋은 각색이란 원작의 번역일 수 없다는 진리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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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작팬들이 싫다. 아주 명확하게 밝히고 이 글을 시작해야겠다. 문학과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나올 때마다 원작팬들은 일단 화를 낸다. 가만 생각해보니 팬들만 화를 내는 건 아니다. 드물게 원작자가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례는 스탠리 큐브릭의 호러영화 <샤이닝>(1980)이다. 호러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 중 하나로 칭송받는 영화다. 원작자 스티븐 킹은 이 영화를 정말 싫어했다. 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큐브릭의 <샤이닝>이 얼마나 형편없는 영화인지 시간이 날 때마다 꾸준히 이야기해왔다. 가장 큰 이유는 영화가 지나치게 계산적이고 차갑다는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스탠리 큐브릭은 계산적으로 차가운 영화를 만드는 예술가다. 큐브릭이 연출을 맡았다면 당연히 그건 큐브릭의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스티븐 킹의 에고는 스탠리 큐브릭의 에고만큼 거대하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호러 소설가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영화감독 중 한 명에게 쉽게 고개를 숙일 이유는 없다. 보통의 작가들이라면 스탠리 큐브릭이라는 거장이 자신의 원작을 영화화했다는 사실 자체에 감격했을 테지만, 스티븐 킹 역시 보통의 작가는 아니다. 문제는 스티븐 킹의 화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남의 원작을 자기 마음대로 각색해서 영화로 만드는 감독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킹은 1997년 자기 소설을 보다 정확하게 각색해 <샤이닝>을 미니시리즈로 다시 만들었다. 미니시리즈였다. 승부는? 압도적인 스탠리 큐브릭의 승리다.
스티븐 킹의 실수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는 위대한 작가다. 글쟁이다. 당연히 자신이 만든 이야기에 자신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그대로 영상으로 옮기기만 해도 굉장한 영화가 나올 거라는 환상이 있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소설과 영화는 완벽하게 다른 매체다. 소설을 영화로 옮기기 위해서는 판을 새로 짜야 한다. 내러티브와 캐릭터를 해체한 뒤 완전히 새로 조립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아무리 완벽에 가까운 소설이라도 마찬가지다. <반지의 제왕>을 생각해보시라. 골수 원작팬들은 아르웬의 역할이 확대되고 톰 봄바딜이 삭제되는 등 주요 인물과 사건이 원작과 달라진다는 이유로 꽤 화를 냈다. 영화를 본 지금은 누구도 화를 내지 않는다. 피터 잭슨이 모두가 만족할 만한 영화를 만든 덕이다.
사실 문학팬들은 어느 정도 영화적 각색에 익숙해졌다. 지난 백 년간 할리우드를 비롯한 세계 영화계는 끊임없이 문학을 영감의 원천으로 이용해왔다. 이젠 하드코어 원작팬들조차도 원작을 곧이곧대로 영상으로 옮기는 게 꼭 좋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은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한다. 이를테면 브래드 피트 주연의 좀비 블록버스터 <월드워Z>(2013)가 그렇다. 맥스 브룩스의 원작은 세계 각국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은 일종의 가상 구술사다. 할리우드는 이걸 브래드 피트가 액션 히어로인 블록버스터 영화로 만들었다. 원작과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어쩔 도리 없다. 원작의 구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상업영화를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막상 나온 영화는 또 그것대로 재미가 꽤 있었고 돈도 많이 벌었다. 아무래도 실패보다는 성공이 낫다.
문학과 영화는 다르다. 영화는 원작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건 이미 지난 백 년간 문학과 영화팬들이 경험으로 충분히 검증하고 내면화한 일종의 상식이다. 우리 모두 그렇게 생각해왔다. <오디세이> 예고편이 등장하자 뭔가 좀 괴상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스스로를 원작팬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의 분노가 쏟아졌다. 아가멤논의 갑옷과 오디세우스의 투구가 시대에 걸맞지 않다는 고증의 문제는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이어서 그냥 지나칠 만도 했다. 아니, 키클롭스와 마녀와 신들이 등장하는 작품에서 투구의 형태와 선박의 구조가 역사적 사실과 들어맞아야 한다는 건 그 자체로 모순이다. 트로이의 헬레네가 흑인이면 또 어떤가. 래퍼 트래비스 스콧이 음유시인으로 등장하면 또 어떤가. <오디세이>는 신화다. 역사가 아니다. 신화는 영화다.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미디어다.
영화가 개봉하자 또 난리가 났다. 몇몇 고전학자들을 비롯한 원작팬들이 크리스토퍼 놀런의 각색을 걸고넘어졌다. 자잘한 각색을 모두 걸고넘어졌다. 단호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영화라는 매체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애초에 21세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 만들 수가 없는 책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이 수억 달러 예산을 투자받아 호메로스의 원작을 영화화하겠다고 결심했다면, 그 전제는 원작을 완전히 해체해서 현대의 이야기로 다시 각색하는 것이다. 놀런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지금 이 시대의 이야기다. 오디세우스라는 신화적 인물을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현대적 인물로 다시 만드는 것이다. 결국 <오디세이>는 트럼프 시대의 세계를 관통하는 우리의 불안에 대한 이야기다.
솔직히 나는 <오디세이> 개봉 전후로 온갖 소셜미디어에서 고증과 각색의 문제를 지적하던 사람들 중 99% 정도는 호메로스의 원작을 제대로 읽어낸 적이 없다고 거의 확신한다. 아마 그들은 호메로스의 원작이 아니라 후대에 등장한 청소년용 각색물과 티브이 드라마 등으로 <오디세이아>를 접했을 것이다. 그들은 애초에 원작팬이 아니다. 가상의 원작팬들이다. 이게 더 문제다. 차라리 진정한 원작팬들이라면 논란도 쓸모는 있다. 원작팬을 자처하는 가상의 원작팬들은 그저 화를 내기 위해 원작을 이용해 먹고 있다. 특히 <오디세이>의 몇몇 캐스팅이 좌파 할리우드가 기획한 PC(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일부라고 확신한 북미 우파 양반들은 온갖 쇼츠를 양산하며 놀런의 영화가 흥행에서 참패할 거라 떠들어댔다. 우리는 역사와 신화에 대한 영화적 상상력조차도 정치적 논쟁이 되어버리는 시대를 열어젖히고 만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학 원작팬보다 더 하드코어한 사람들도 있다. 게임 원작팬들이다. 지금 북미 박스오피스를 거의 쓸다시피 하고 있는 잭 크레거 감독의 <레지던트 이블>은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다. <바바리안>과 <웨폰>으로 2020년대 호러영화의 이른 거장이 된 잭 크레거는 밀라 요보비치 주연의 지난 시리즈와는 완전히 결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당연한 일이다. 밀라 요보비치 주연의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는 이미 생을 다하고도 좀비처럼 끈질기게 후속작들을 내놓으며 비평과 박스오피스 모두에서 의미를 잃었다. 더는 영화로 만들 이유도 없었다. 사실 원작팬들은 이전 시리즈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게임의 인기 캐릭터인 레온 케네디, 클레어 레드필드, 질 발렌타인이 게임에는 등장하지 않는 앨리스(밀라 요보비치) 캐릭터에 밀려 조연으로 밀려났던 탓이다. 원작팬들은 새로운 영화가 자신들이 사랑한 게임의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믿었다.
바보 같은 믿음이다. 이미 우리는 지난 20년간 그들이 조연으로 등장하는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를 보아왔다. 다시 비슷한 걸 만들어봐야 영화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 게다가 원작 게임의 이야기가 뭐 그렇게 영화적으로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옛날 게임이다. 첫 <레지던트 이블> 게임은 혁명적이고 혁신적이었지만 다 옛날이야기다. 이미 우리는 비슷한 이야기, 비슷한 비주얼, 비슷한 세계관을 게임으로 영화로 지겹도록 보아왔다. 원작팬이라는 양반들이 원하는 건 그저 과거의 추억에 불과하다. 추억에 기대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잭 크레거 감독은 새롭게 출발하기를 원했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가장 보통의 주인공을 내세워 세계관을 다시 쌓았다. 게임 속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게임을 플레이할 때의 긴장감을 관객들이 그대로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영화 <레지던트 이블>의 본질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잭 크레거의 선택은 옳았다. 개봉 직후 <레지던트 이블>은 지난 시리즈 전부를 합친 것만큼의 압도적인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동시에, 역사상 단 한 번도 흥행에 성공한 적 없는 서바이벌 호러 게임 영화화의 새로운 미래를 열었다.
<레지던트 이블>과 <오디세이>는 같은 질문을 던진다. 원작팬이 생각하는 충실함과 영화감독이 생각하는 충실함은 왜 같을 수 없는가? 원작의 팬들은 영화가 캐릭터, 시대, 사건, 설정을 충실하게 재현하길 원한다. 그것이 원작에 대한 경의라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원작의 모든 설정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으로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대신 그들은 원작의 더 깊은 본질에 다가가고 싶어 한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오디세이>를 인류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로 다시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기원전 8세기 후반의 신화는 새로운 독자들을 찾았다. 잭 크레거는 <레지던트 이블>에서 게임의 설정을 재현하지 않았다. 대신 게임의 공포와 생존 경험을 재현하려 했다. 영화는 게임팬을 넘어서 보다 보편적인 관객들을 <레지던트 이블>의 세계와 만나게 했다. 결국 두 영화 모두 원작을 어느 정도 버림으로써 오히려 원작의 가능성을 확장시킨 것이다.
문학이든 게임이든 원작을 각색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원작에서 일어난 일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원작을 경험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재현하는 것이다. 스티븐 킹은 위대한 작가지만 형편없는 영화감독이었다. 그는 아마도 죽는 날까지 인정하지 않겠지만,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은 ‘최고의 스티븐 킹 원작 영화’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스탠리 큐브릭은 스티븐 킹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옮기는 대신 스티븐 킹의 이야기가 지닌 공포의 본질을 스크린에 옮겼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원작을 다루는 영화감독의 태도여야 한다고 믿는다. 아니, 영화의 본질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김도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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