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추럴 와인의 성지 쥐라에서 6명의 와인 메이커를 만나다
지금 쥐라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쥐라에서 사흘 동안 여섯 곳의 와인 생산자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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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피앵 끝자락에 있는 필립 보나르의 집은 경사지에 지어져 전면과 후면이 약 세 층 높이 정도 차이 난다. 집 뒤쪽에 면해 야외 테이블과 양조 작업장 등이 있다. 필립은 이날 작업 중에 우리와 만났다.
내추럴의 사도, 필립 보나르
쥐라 와인의 성지 아르부아에서 남쪽으로 3km. 작은 언덕 하나를 넘으면 퓌피앵(Pupillin)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포도밭에 둘러싸인 몇십 채의 가옥이 전부인 이 마을은 내추럴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예루살렘 같은 곳이다. 피에르 오베르누아가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1968년 가업을 이어받아 내추럴 와인이라는 단어가 없던 1980년대 중반부터 무수아황산을 넣지 않고, 토착 효모로 쥘 쇼베의 가르침을 쥐라의 언덕에서 실천한 사람, 프랑스 내추럴 와인 운동의 ‘아버지’이자 조금 과장하면 지저스인 인물. 그런데 이 피에르 오베르누아의 사도와도 같은 동네 동생이 있으니 바로 오늘의 주인공 필립 보나르다.
보나르 집안은 대대로 퓌피앵의 포도밭을 지켜온 농부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대에는 직접 와인을 담갔지만, 아버지 대에 이르러 마을 협동조합(fruitière)에 들어가면서 수확한 포도를 조합에 넘겼다. 가업을 물려받은 필립도 자연스럽게 같은 길을 걸었다. 다만 그는 평범한 조합원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조합 포도를 양조하는 역할을 맡았고, 집 아래 비좁은 지하 셀러에서 식구들과 이웃이 함께 마실 와인을 따로 담갔다. 그런데 그 와인을 맛본 옆집 형이 하필 피에르 오베르누아였다는 사실. 훗날 필립이 독립할 무렵, 오베르누아는 그를 두고 “내가 아는 라벨 없는 와인 중 최고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저스에게 그런 말을 들은 그의 이름이 열두 사도 중 하나의 이름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여튼 내추럴 와인의 사도 필립이 결국 마음을 먹은 것은 2005년. 그해 필립은 협동조합을 떠나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단 병을 세상에 내놓았다.
출발은 늦었지만 속도는 빨랐다. 그의 밭은 대부분 퓌피앵을 둘러싼 원형극장 같은 석회질 점토 언덕에 있었고, 수령 30년이 넘는 늙은 포도나무들이으며, 양조는 옆집 형의 가르침을 따랐다. 토착 효모로 발효하고, 개입은 최소한으로, 무수아황산은 사고를 막을 정도로만 아주 조금 썼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베르누아의 복사본이 아니었다. 산화 숙성하는 뱅 존부터 산화를 막은 신선한 우이예(ouillé) 화이트, 자연스러운 거품을 품은 펫낫까지 모든 스타일을 시도했고, 해마다 새로운 무언가를 내놓았다. 불과 10년. 그는 ‘쥐라의 록스타’라 불리며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가 셀러에서 물러난 2017년 이후 아들 토니 보나르의 라벨로 바뀐 붉은 여우 보틀은 파리에서 도쿄까지 내추럴 와인 바를 상징하는 라벨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만나러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가 다시 자신만의 와인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오베르누아의 집에서 모퉁이를 두 번 돌면 보이는 마을의 끝자락. 멀리서 필립의 상징인 여우가 그려진 푯말이 보였다. 우리가 간 날 필립은 홀로 지게차를 이끌며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고, 지하에 있는 양조장에는 중간 크기의 양조용 스테인리스 탱크들이 늘어서 있었다. 백발이지만 청년의 얼굴을 한 그는 그 사이를 혼자 오가며 무언가를 나르고, 붓고, 맞췄다.
그가 잔에 따라준 첫 와인은 풀사르였다. 퓌피앵은 쥐라에서도 풀사르의 마을로 유명하다. 왜 그런지 묻자 그가 짧게 답했다. “붉은 점토, 붉은 이회토(marnes rouges)가 있는 이 땅은 풀사르와 사바냥을 기르기에 적당한 땅이에요.” 2023년은 오랜만에 수확다운 수확을 한 해였다고 했다. “쥐라는 이제 2년에 한 번씩 서리를 맞으니까요.” 필터링을 하지 않은 풀사르지만, 그 색이 옅다. 레드라기보다 로제에 가까워 보인다. 입안에 넣어보면 타닌은 거의 느껴지지 않고 싱그러운 산미와 과실 향이 가득하다. 사람들은 그래서 이 와인이 오래가지 못하리라 예상하곤 한다. 그러나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30년, 40년? 그보다 더 갈걸요. 색이 옅은 건 껍질이 아주 얇아서예요. 이건 레드 와인 양조 방식으로 만든 겁니다.”
그날 저녁 우리는 필립의 집 마당에서 그가 양조한 풀사르와 트루소 그리고 믈롱 아 크 루주(Melon à Queue-Rouge)를 마셨다. 아무런 계약 없이 취리히, 뉴욕,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필립의 옆에 모여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프랑스어와 영어와 독일어가 동시에 오갔고, 아무도 명함을 꺼내지 않았다. 누군가 “이 와인 한 병 살 수 있느냐”고 묻자 필립은 “많지는 않지만 병으로는 좀 있다”며 셀러로 내려가더니 보틀을 꺼내 직접 자신의 손으로 라벨 스티커를 붙였다. 세상의 내추럴 와인 팬들이 왜 쥐라에 열광하는가. 그 질문의 첫 번째 답은 어쩌면 이 마당에서 벌어진 광경에 있다. 세계적인 슈퍼스타 와인메이커라도 여전히 농부의 자세로 자연을 대하고, 옆집 사람에게 대접하는 자세로 와인을 만들고, 사람의 태도로 사람을 대한다.
룰루 비녜롱의 양조장 1층에 있는 객실과 아름다운 뒤뜰이다. 별칭 ‘룰루 할아버지’로 더 유명한 루트비히 빈더나겔이 우리 일행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자유의 문법, 룰루 비녜롱
룰루 비녜롱(Lulu Vigneron)의 와인메이커 루트비히 빈더나겔은 우리 일행이 이틀을 머물렀던 폴리니(Poligny)에서 호텔을 경영하며 호텔 옆에 붙은 부속 건물에서 와인을 양조하고 호텔 지하에 있는 셀러에서 와인을 숙성한다. 우리는 호텔 뒤뜰에 있는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에 따르면 불과 20년 전만 해도 쥐라 와인은 동네에서나 마시는 술이었다. “2007년만 해도 지금과는 정반대였어요.” 당시 그는 쥐라의 와인메이커들을 설득해 파리로, 토론토로, 뉴욕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뉴욕에서 쥐라 와인 시음회를 열었는데 업계 전문가들이 와인을 맛보더니 웃기 시작했어요.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냐면서요.” 그 역시 웃으며 말했다. “이유는 간단했어요. 아무도 우리에게 100점짜리 와인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가르쳐 준적이 없었거든요. 다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었고, 모든 와인이 완전히 달랐던 겁니다. 그러다 그들이 우리가 자유롭게 만드는 걸 좋아하기 시작했죠.”
그 자유를 대표하는 이름들이 지금 쥐라의 전설을 만들었다. 퓌피앵의 오베르누아, 오베르누아의 정신적 아들인 에마뉘엘 우이용. 몽티니레자르쥐르에서 1990년 가업을 이어받아 유기농과 비오디나믹으로 아르부아 와인의 실루엣을 다시 그린 스테판 티소. 남쪽 로타리에의 장프랑수아 갸느바, 그리고 쥘리앵 라베와 그 형제들이 이끄는 도멘 라베. 얼마 뒤에 만난 쥐라의 샛별 발렌탱 모렐은 이 이름들을 차례로 부른 뒤 자신은 이들에 비하면 “스공 쿠토(second couteau)”라고 말했다. 조연이라는 겸양의 뜻. “그분들 급이 아닙니다. 겸손하게 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래요.”
흥미로운 건 이 전설들이 순수한 ‘쥐라 토박이 방식’에서만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룰루는 오베르누아도 갸느바도 사실 부르고뉴의 방식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갸느바는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 샤사뉴몽라셰의 도멘 장마르크 모레에서 셀러 마스터로 일했고, 스테판 티소는 본에서 공부하고 호주 브라운 브라더스에서 일한 뒤 돌아왔다. 룰루 자신도 파리의 건축가로 일하며 부르고뉴에 반했지만 땅값을 감당할 수 없어 쥐라로 온 뮌헨 출신이다.
쥐라가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전통적인 방식은 ‘수 부알’이다. 수 부알은 프랑스어 ‘sous voile’, 즉 ‘베일 아래’라는 뜻으로, 숙성 중 증발한 만큼 와인을 채워 넣지 않아 생긴 빈 공간에서 표면에 하얀 효모 막(voile)이 덮이게 하는 방식이다. 이 막이 와인을 지키며 천천히 산화시키고, 그 아래서 와인은 풋호두와 카레, 향신료 같은 쥐라 특유의 향을 얻는다. 산화 숙성 대신 와인이 증발할 때마다 같은 와인을 부어주며 통을 가득 채워 산화를 막는 것이 ‘우이예(ouillé)’ 방식으로, 최근에는 다수의 와이너리들이 우이예를 생산한다. 우이예처럼 쥐라를 ‘새롭게’ 보이게 한 많은 것은 사실 부르고뉴의 문법이었다. 쥐라의 전설은 전통을 지킨 사람들과 바깥에서 새로운 문법을 들여온 사람들이 같은 땅에서 부딪히며 만들어졌다.
필립 샤티옹은 쥐라 농부의 전형적인 천진함과 순수함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전설의 산증인, 필립 샤티옹
룰루 비녜롱의 호텔에서 2분 거리, 폴리니 중심가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한 민가의 철문을 밀고 들어가면 작고 아름다운 마당이 펼쳐진다. 필립 샤티옹의 집이다. 샤티옹은 현대 쥐라 와인사의 축소판이다. 그가 쥐라에서 처음 와인을 만든 것은 1989년. 이후 아르부아의 도멘 드 라 팡트에서 18년간 관리자로 일했고, 2009년 그곳을 떠나 프랑스 곳곳의 포도밭을 돌았다. 그러다 2013년, 파스낭의 언덕에 사바냥 밭 한 뙈기를 구해 자기 도멘을 시작했다. “그때 저는 쉰세 살이었고, 거의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습니다. 트랙터도 없었어요. 제 손과 다리뿐이었죠.” 그의 셀러에는 서두름이 없다. “제 화이트는 전부 배럴에서 발효하고 1년, 2년, 혹은 3년을 둡니다. 수티라주(앙금을 버리고 맑은 와인만 따라 통을 갈이하는 작업)도 하지 않아요. 그냥 기다립니다. 가끔 배럴이 ‘툭툭툭’ 하고 신호를 보내요. 이제 때가 됐다고. 그러면 맛을 보고 ‘좋아’ 하고 병입하는 거죠.”
샤티옹은 쥐라에서 비오디나믹을 가장 먼저 시도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의 기억으로는 1995년 라 팡트에서였다. “다들 제가 완전히 미쳤다고 했죠.” 그는 쥐라가 바뀐 결정적 계기로 한 행사를 꼽았다. ‘르 네 당 르 베르(Le Nez dans le Vert, 코를 잔 대신 ‘초록’에 박는다는 말장난)’다. 2011년 3월, 바로 그가 오래 일했던 도멘 드 라 팡트에서 스물두 곳의 쥐라 유기농 생산자들이 처음으로 모였다. 공식 기관의 도움 없이 생산자들이 스스로 꾸린 첫 유기농 와인 박람회였다. “그 뒤로 아일랜드, 벨기에, 스웨덴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쥐라 와인을 맛봤습니다.” 2013년 같은 시음회에선 티소, 갸느바, 라베, 보나르가 나란히 테이블을 펼쳤다. 올해 3월 16회를 맞은 이 행사는 이제 내추럴 와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행사 중 하나다.
그전까지 쥐라는 샤토 샬롱의 뱅 존으로 이름이 알려진, 조금 이상한 와인을 만드는 산지였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쥐라 와인이라고 소개하면 손사래를 쳤어요. 가끔은 정말 마실 수 없을 정도였거든요.” 30년 전과 지금을 그는 한 문장으로 비교했다. “예전에는 제가 돈을 주면서 와인을 가져가게 해야 했어요. 지금은 사람들이 ‘제발 한 병 주세요’라고 합니다. 정말이지 남은 게 없어요.”
로랑과 그의 딸 카르멘 마클의 모습. 그날 카르멘 마클은 우리 일행을 뱅 존의 미로 속으로 안내했다.
전통의 속도, 도멘 마클과 루시앙 아비에
그러나 쥐라의 변화를 ‘내추럴 와인의 승리’로만 읽으면 많은 것을 놓친다. 이 지역의 변화는 느리다. 그리고 그 느린 속도는 대부분의 경우 의도적이다. 그 속도를 가장 잘 보여준 곳이 샤토 샬롱의 도멘 마클과 몽티니레자르쥐르의 루시앙 아비에였다. 샤토 샬롱은 쥐라에서 가장 엄격한 곳이다. 이 이름을 쓰려면 사바냥으로 만든 뱅 존이어야 하고, 부알 아래에서 최소 6년 3개월을 버텨야 하며, 알코올이 12도에 못 미치면 그해에는 샤토 샬롱을 만들 수 없다.
이 마을의 대표 도멘 마클은 1850년대에 세워졌다. 세상을 떠난 장 마클이 명성을 쌓았고, 지금은 그의 아들 로랑과 로랑의 딸 카르멘이 함께 이끌고 있다. 우리를 셀러로 안내한 사람이 바로 카르멘 마클이었다. 열다섯 살부터 여름마다 셀러에서 일했고, 열여덟 살에 이 길을 택한 포도 수저 중의 포도 수저. 그녀는 반지하 셀러의 통마다 달린 작은 장치를 가리켰다. 막을 건드리지 않고 와인을 꺼내기 위한 것이다. “막은 종이처럼 아주 얇습니다. 그리고 아주 연약하죠.” 마클은 같은 와인을 반지하 셀러, 완전한 지하 셀러, 다락 세 곳에 나눠 숙성한다. 온도 변화가 큰 다락에서는 막이 두껍게, 지하에서는 얇게 잡힌다. 다양한 곳에서 숙성하며 서로 다른 아로마를 모은다.
그런 마클이 ‘우이예 샤르도네’를 만든다. 카르멘이 말했다. “25년 전만 해도 우리가 우이예를 만든다고 하면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을 거예요. ‘부르고뉴처럼 한다’고 비판했겠죠.” 실제로 로랑 마클이 우이예를 처음 시장에 내놓았을 때, 오랜 단골들은 “이건 쥐라가 아니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시음 순서 자체는 역사를 거슬러 오르는 기분이었다. 배럴에서 1년 반을 보낸 2023 샤르도네 우이예, 그리고 같은 샤르도네를 5년 동안 막 아래 둔 2019 빈티지의 수 부알을 맛봤다. “와, 완전히 반대네요.” 일행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우이예 샤르도네는 활기차고 우아했으며 2019년 빈티지의 수 부알은 묵직하고 너티했다. 샤토 샬롱이라는 가장 보수적인 마을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그 두 잔의 와인에 담아둔 것 같았다.
20~30대 소비자들이 낮은 도수와 캐주얼한 와인을 찾는데 바꿀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쥐라의 속도를 그대로 보여줬다. “이 퀴베들은 100년 동안 만들어온 저희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바꾸고 싶지 않아요. 물론 알코올이 낮고 마시기 편한 퀴베도 만들어요. 그게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일 수도 있겠네요.”
트루소의 고향, 몽티니레자르쥐르. 1960년 알제리 전쟁에서 돌아온 루시앙 아비에는 이 마을에서 자기 이름으로 와인을 병입한 첫 세대가 되었다. 친구들이 ‘바쿠스’라 불렀던 그는 1968년 지질학자 친구들과 ‘바쿠스 형제회’를 만들었고, 그래서 그의 트루소 이름은 ‘퀴베 데 제올로그(지질학자들의 퀴베)’다. 루시앙은 2021년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아들 뱅상과 손자 막상스가 셀러를 지킨다.
아비에는 유기농이 아니다. 그렇다고 요즘 주목받는 내추럴 와인이나 비오디나믹도 아니다. “저희는 뤼트 레조네(lutte raisonnée)예요.” 막상스가 말했다. ‘합리적 방제’로 번역하는 이 말은 유기농법과 비오디나믹을 섞은 듯한 느낌이다. “유기농에서는 기계 수확이 허용됩니다. 저희는 전부 손으로 수확해요. 유기농 방제의 문제는 구리가 토양을 포화시킨다는 거예요. 지금으로서는 저희가 다른 와이너리보다 토양을 더 오염시킨다는 느낌은 없어요.” 손으로 수확하고, 토착 효모를 쓰고, 최소한으로 개입하지만 최소한의 무수아황산은 사용한다. 막상스는 “우리가 지키는 것은 어떤 라벨이 아니라 그해와 그 땅이 드러나는 와인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쥐라의 도멘들은 변화의 속도를 스스로 선택한다.
자신의 포도 밭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쥐라의 라이징 스타 발렌탱 모렐(Valentin Morel)의 모습. ⓒLéa Crespi
모두를 위한 내추럴 와인, 발렌탱 모렐
그리고 앞서 잠시 언급한 쥐라의 떠오르는 샛별, 폴리니의 발렌탱 모렐이 있다. 법을 공부하고 도청에서 일하던 그는 2014년 아버지의 도멘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밭에서는 유기농이었지만 양조는 아주 기술주의적이셨죠. 그래서 제가 내추럴 와인으로 전환했습니다. 전부 아황산 없이, 자연 효모로, 무여과로. 처음부터요. 저는 정치적으로 생태주의자이고 유기농을 지지합니다. 제게 내추럴 와인은 유기농 농사의 연장선이에요. 밭에서 포도를 제대로 길렀다면 양조에서도 그것을 최대한 존중해야 하니까요.”
아황산 없이 와인을 만든다는 건 미생물과 맨손으로 싸운다는 뜻이다. 더운 해일수록 포도의 산도가 떨어지고, 산도가 떨어지면 젖산균이 너무 일찍 깨어나 남은 당분을 먹기 시작한다. 그러면 휘발산이 치솟고 와인은 식초처럼 변한다. 필립도 그의 마당에서 같은 질문을 던졌다. “문제는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아황산 없이 와인을 만들 수 있을지예요.” 모렐이 내놓은 답은 피에 드 퀴브(pied de cuve)다. 수확 열흘 전 사바냥을 조금 먼저 따서 발효 스타터를 만들고, 열흘 뒤 본 수확에 가면 이 스타터로 곧바로 발효를 시작한다. 이미 활발해진 효모가 먼저 자리를 차지해 젖산균이 끼어들 틈을 없애는 것이다. 어쩌면 쥐라와 내추럴 와인의 미래는 결국 이런 기술 위에 서 있다.
내추럴 와인의 또 다른 약점은 가격이다. 화학적 방제를 하지 않아 생산성이 떨어지고 모든 것을 손으로 하다 보니 생산 단가가 올라간다. 모렐은 이 문제를 품종의 변화로 풀어보려 하고 있다. 하이브리드는 유럽 포도(Vitis vinifera)와 미국이나 아시아의 다른 포도 종을 교배한 품종이다. 19세기 말 필록세라 이후 프랑스는 미국 포도 뿌리에 접붙이는 길을 택했고, 하이브리드는 ‘질 낮은 포도’라는 낙인과 함께 쫓겨났다. 그러다 기후변화와 농약 문제가 겹치면서 병에 강한 새 세대 교배종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모렐의 밭 7.5헥타르 가운데 1.5헥타르가 하이브리드다. 첫 구획은 2017년에 심었다. 그가 하이브리드를 택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방제다. “제가 가진 하이브리드에는 방제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가장 자연에 가까운 방식이죠.” 유기농이라 해도 구리와 황을 뿌려야 하는 현실, 아비에가 날카롭게 짚었던 바로 그 구리 문제를 하이브리드는 품종의 단계에서 해결한 셈이다. 둘째는 가격이다. “저는 정치적으로 좌파인데, 실제로는 부자들을 위한 와인을 만들고 있잖아요. 그래서 모두를 위한 대중적인 와인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의 다른 와인들은 평균 20유로인데, 하이브리드 와인은 10유로에 판다(물론 한국 내 가격은 그 서너 배가 넘는다). 규정 때문에 라벨에 품종명을 쓸 수 없어 품종명 자리에는 그냥 ‘레 비뉴 이브리드(Les Vignes Hybrides)’라 적혀 있다. 그의 하이브리드가 쥐라 내추럴 와인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그는 그에 대한 생각을 2023년 자신의 책 <다른 와인(Un autre vin)>에 담았고, 이 책은 프랑스에서 하이브리드를 공론장으로 끌어올렸다.
제일 왼쪽에 있는 아버지 뱅상 아비에와 중간에 있는 막상스 아비에가 포도 줄기를 걸러내는 장치에 넣고 있다.
풀 서비스 캐리어, 쥐라
쥐라를 찾기 전까지 내 머릿속에는 두 개의 쥐라가 있었다. 샤토 샬롱으로 대표되는 뱅 존의 세계인 올드 쥐라. 그리고 세계적인 내추럴 와인 성지로서의 뉴 쥐라. 그러나 사흘 동안 다섯 명의 생산자를 만나며 그들의 와인을 마시다 보니 그 구분이 흔들렸다. 지금 쥐라가 겪고 있는 변화는 ‘전통 대 내추럴’의 대결이 아니다. 전통은 전통대로 남았고, 그 위에 새로운 시도들이 더해졌고, 그 결과 쥐라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넓은 선택지를 가진 산지가 되었다. 쥐라는 이제 이코노미 좌석 하나만 파는 저가 항공사가 아니다. 이코노미부터 일등석까지, 기내식과 라운지까지 다 갖춘 풀 서비스 캐리어다.
뱅 존부터 우이예, 두 개의 대표 레드 품종과 피노, 고대 품종 믈롱 아 크 루주, 뱅 드 파유와 막뱅, 그리고 쥐라 AOC 생산량의 4분의 1이 넘는 크레망까지. 아페리티프 와인부터 디저트 와인까지 모든 라인업이 쟁쟁한 타선으로 가득 차 있다. 2000헥타르의 좁은 산지와 품종 다섯 개로 이 정도를 해내는 곳을 찾기란 힘들다. 내추럴이냐 아니냐는 이제 이 거대한 메뉴판의 한 페이지일 뿐이다. 마클은 수 부알 곁에 우이예를 더했고, 아비에는 레조네로 남았고, 모렐은 아황산을 버리고 하이브리드를 취했다. 누군가의 변화는 다른 누군가를 지우지 않고 더했다. 쥐라가 지금 대단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
Credit
- PHOTO 도멘 마클/도멘 루시앙 아비에/도멘 필립 샤티옹 제공
-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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