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프리드리히 쿠나스가 초대하는 석양과 사랑의 세계

동독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한 쿠나스는 풍경과 아포리즘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진심으로.

프로필 by 박세회 2026.09.29

로스앤젤레스를 베이스로 하지만 뮌헨, 오스트리아의 산간, 베를린 등을 오가며 생활하고, 또 새로운 도시들을 자주 돌아다니는 걸로 알아요.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뭔지 궁금해요.

이어폰을 꽂고 한두 시간 도시를 걸어요. 사운드트랙을 깔고 방향 없이 표류하듯이. 그게 새로운 장소에 몸을 담그는 제 방식이에요. 프랑스어에는 그런 행위를 뜻하는 단어가 있어요. ‘플라뇌르’(flâneur)라고 해요. 사전적 정의로는 목적 없이 걷는 것을 뜻하죠. 목적 없이 걸으면 주변의 모든 걸 흡수하게 돼요. 나에게 다가오는 작은 디테일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죠. 사람들을 보고, 노는 아이들을 보고, 건물에서 건물로 날아가는 새를 봐요. 그러다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장소의 시(詩)가 서서히 잡혀요.

그다음으로 좋은 ‘뮤직 바’를 찾으시는군요? 한국에 온 첫날 종로에 있는 LP바 ‘라커스’를 찾아 노래를 들으며 맥주를 마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새로운 곳에서는 너무 많은 걸 원하지 않으려고 해요. 이 도시에선 그 베이커리에 꼭 가야 한다는 둥 그 레스토랑엔 꼭 가봐야 한다는 둥의 식이 되지 않게요. 플라뇌르를 하며 서성이고 나면 서울에서 그랬던 것처럼 LP를 틀어주는 뮤직 바 같은 곳을 찾게 되지요. 음악은 제가 하는 거의 모든 일의 모티브니까요. 갤러리나 미술관에는 오히려 관심이 덜해요. 정말 흥미로운 전시가 아니라면, 제가 하는 일의 연장선을 여행지에서까지 반복하고 싶지 않아요. 예술로부터 잠깐 떨어져 쉬고 싶은 거죠. 평소에 하루 종일 스튜디오에 있거나 테니스를 치니까요. 좋은 재킷을 찾아보고, 좋은 분위기에서 좋은 음악을 듣고, 서점에서 표지가 마음에 드는 책을 들춰보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 택시 기사와 대화하는 것. 제가 사랑하는 건 그런 것들이에요. 택시 기사들은 늘 최고의 정보를 주거든요.

페이스 갤러리의 담당자들을 통해 서울에서 갈 만한 곳들의 리스트를 잔뜩 받은 걸로 아는데, ‘라커스’를 고른 이유가 궁금해요.

재미있는 우연이었어요. 알고리즘에 뜬 영상이 있었거든요. 나이 든 분이 LP를 꺼내서 올리는 장면이었고, 신청곡을 종이에 적어 내면 틀어주는 방식이더라고요. 그걸 보고 ‘세상에, 저기 가고 싶다’고 했어요. 나중에 페이스 관계자들이 그런 곳을 추천해줬는데, 바로 그곳이 있더라고요. 심지어 관계자분이 라커스에 가본 적도 있다고 하더군요.

첫 신청곡이 뭐였나요?

더 스미스의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였어요. 울지 않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요. 시차에 지쳐 있는데 누가 ‘Wichita Lineman’ 같은 노래를 트는 거예요. 그러면 이상하게 집에 온 듯 평안함이 밀려와요. 갑자기 그 사람이 가족처럼 느껴지죠. 음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서로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웬만해서 울지 않는데, 한국에서 두 번 울었어요.

나머지 한 번은 언제였나요?

어제 갔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요. 칼쿠타(Calcutta, 영어식으로는 캘커타)라는 밴드의 노래가 우연히 나왔는데, 제겐 아주 사적이고 사연이 깊은 곡이거든요. 그걸 두 번 연달아 틀더라고요.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공공장소에서 우는 건) 거의 없는 일인데 충격이 컸어요. 낯선 나라, 낯선 장소였고, 지난 2년 동안 개인적으로 격변의 시간을 겪었거든요. 그게 끝나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제 서울의 일정이 끝나면 LA로 돌아가요. 그전에는 유럽에 있었고요. 정말 많이 에둘러 왔어요. 때로는 노래가 어떤 자리에 정확히 도착해요. 그러면 우리는 그 노래에 항복할 수밖에 없어요.

항복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노래의 의미가 너무 커져버려서, 포기하고 그냥 흘려보내라고, 밖으로 내보내라고 말하게 되는 상태가 되는 거죠. 괜찮다고요. 그래서 제가 이 음악에 중독된 거예요. 그런 순간들이 모든 걸 설명해요.

아…, 정말 그래요. 나이가 들수록 음악을 들으면 감정에 압도당하는 순간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제 쉰 번째 생일이 인생 최악의 경험이었어요. 저는 생일을 싫어해서 평생 파티를 연 적이 없는데, 쉰이니까 한번 해보자 싶어서 친구를 50~60명 불렀어요. 이탈리아 해변이었고요. 그런데 하루 전날 신경쇠약이 왔어요. 닐 영의 ‘Comes a Time’을 듣고 있었는데, 밤에 해변을 걷다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가 없었어요. 평소의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죠.

동독에서 태어나셨다는 게 놀라웠어요. 지금의 당신은 완벽한 자본주의 라이프스타일의 구루 같은 이미지니까요. 당신의 스타일을 좇는 남자들이 많잖아요. 성장 배경과 지금의 스타일 사이에 관계가 있나요?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어요. 동독은 아주 가난한 곳이었고 저는 동베를린에서 자랐어요. 그곳에서 반체제적인 사람들, 공산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었어요. 대신 옷으로는 자기를 표현할 수 있었죠. 아버지와 어머니 주변은 거의 모두가 음악가와 배우였어요. 공산당에 ‘엿 먹어라’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방법은 리바이스를 입는 거였죠. 그 사람들은 리바이스를 한 벌 구하면 늘 그걸 입었죠. 데님은 곧 자유였어요.

‘The End(Couple)’, 2024-2026, oil on canvas, 152.4 x 121.9 x 5.1cm.

‘The End(Couple)’, 2024-2026, oil on canvas, 152.4 x 121.9 x 5.1cm.

데님이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나요, 미국의 상징이었나요?

미국의 상징이었죠. 동독에서는 학교에 청바지를 못 입고 가기도 했어요. 너무 미국적이라는 이유로요. 저희 아버지도 늘 청바지가 정말 멋진 거라고 생각했어요. 롤링 스톤스의 혀 로고가 프린트된 티셔츠는 당시에 할 수 있는 가장 미친 짓이었고요. 한번은 그걸 입고 학교에 갔다가 바로 집으로 쫓겨났죠. 그래서 저는 데님이라는 관념을 좋아해요. 거기엔 늘 서구의 어리석은 아이디어가 섞여 있으니까요.

믿을 수 없겠지만, 한국의 1980년대에도 반미를 외치는 학생운동 진영에서 청바지를 거부했지요.

정말요? 뭔가… 재미있네요.

미술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열일곱에 미술학교에 들어갔어요. 아마 가장 어렸을 거예요. 다들 스물, 스물하나였으니까요. 그리고 다들 예술가의 옷을 입고 있었어요. 지저분한 옷이요. 저는 늘 거기에 반발했어요. 예술가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죠. 오히려 변호사처럼, 그곳에 속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죠. 실제로 저는 거기 속하지 않았으니까요. 당시에 옷을 일종의 신호로 쓴 거예요. 나는 여기 속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내가 표현하고 싶은 나만의 상(像)이 있다. 예술가는 가난하고 거칠어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늘 반대했어요. 저는 늘 옷을 잘 입는 인물들에게 끌렸어요. 브라이언 페리나 레너드 코언을 보세요. 그 사람들은 자기를 표현하는 좋은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미술계 전반에는 어떤 코드가 있지요. 저만 해도 미술계 모임에 갈 때면 늘 올 블랙을 입곤 하죠.(웃음)

(웃음) 맞아요. 일종의 교리 같은 게 있어요. 저는 옷의 재단이나 그게 몸에 어떻게 걸리는지에 대해 본능적으로 관심이 많아요. 모으는 것도 재미있고요. 한번 사면 20년, 30년씩 갖고 있어요. 절대 버리지 않아요.

몇 살 때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오셨나요?

저는 동독의 카를마르크스슈타트에서 태어났어요. 지금은 그 이름을 안 쓰고 옛 이름인 켐니츠라고 다시 부르고 있죠.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도시에서 태어난 셈이에요. 아이러니하죠. 열두 살 때 부모님이 동독에서 추방당했어요.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선 서브컬처의 핵심 인물이라고 지목당해서였죠. 당국은 당시에 저희 부모님을 비롯한 음악가와 배우들에게 24시간을 줄 테니 나가라고 명령했어요. 24시간 안에 가방 하나만 들고 서베를린으로 가야 했죠. 아시겠지만, 같은 도시라 기차로 한 정거장이었어요. 저는 가방 하나와 테니스 라켓을 들고 갔지요. 그때 찍은 사진을 아직도 좋아해요. 3년 뒤인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으니까, 저는 두 체제 모두에서 성장한 셈이에요.

당시 동독의 비밀경찰 조직이던 ‘슈타지’의 파일이 공개됐을 때, 당신의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 중에도 당신의 부모님과 주변인을 감시하던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요.

맞아요. 저는 그 사람들과 제 유년을 연결해서 생각해요. 그런데 늘 그렇듯이, 아름다움에는 항상 가시가 있어요.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늘 있죠. 저는 그 트라우마를 안고 자랐어요. 제 작업에도 아름다움과 숭고함과 로맨스가 아주 많지만, 어딘가에는 늘 고통이 섞여 있어요. 그런 걸 겪으며 자라면 사람에게 무언가가 남아요. 그게 이후에 제가 세상을 통과하는 방식이 되었어요. 이를테면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에 울게 되는지에까지 영향을 미쳤지요.

동독에 살 때 당신의 집에는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전시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우연찮게도 당신이 태어난 1974년은 프리드리히의 탄생 200주년이더군요.

맞아요. 전 그 포스터와 함께 자랐어요. 그런데 제 이름(프리드리히)은 그 화가 때문이 아니에요. 프리드리히 니체에서 왔어요. 1974년에 병원에서 어머니에게 아이 이름을 뭘로 할 거냐고 물었는데, 프리드리히라고 하니까 처음엔 안 된다고 했어요. 당시 니체는 나치와 연결되는 사상(‘초인사상’)을 가진 인물로 여겨졌거든요. 그런데 제 할아버지 이름도 프리드리히라서 쓸 수 있었어요. 제 이름도 결국 롤링 스톤스의 혀 같은 거였죠.

그런 포스터를 방에 붙여두는 게 당시에 흔한 일이었나요?

드문 일은 아니었어요. 그런 복제본이 우리가 예술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니까요.

당신의 작품에 쓰여 있는 아포리즘적인 문장들은 장난처럼 보이지만 진심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그 포스터의 연장선 같기도 하고요.

프리드리히나 프레더릭 에드윈 처치의 풍경은 장엄하고 숭고한 것에 닿아 있어요. 저는 제 그림을 보는 관객들을 끌어들이고 싶어요. 아름다움을 통해 들어오게 하고 싶어요. 제 트로이의 목마는 풍경이에요. 그게 곧 포스터죠. 포스터는 당신을 초대하고 풍경은 당신을 안으로 데려가요. 고통이 있고 감정이 있는 장소로 당신을 이끌지요. 저에게는 늘 음악과 아름다운 화성이 필요했어요. 저를 초대하는 무언가가요. 음악은 아트와는 달라요. 음악은 우리가 이미 그 안에 들어가서 소리의 텍스처가 주는 아름다움 안에 있을 때 가사가 시작되죠. 실연과 실존적인 것들과 우울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흥미로워지는 거예요. 반대로 대부분의 아트는 지적으로 풀어내야 하는 전제를 앞에 내세워요. 저는 음악의 방향에서, 즉 대부분의 아트와는 반대 방향에서 접근해요.

그래서 ‘치지(cheesy)하다’는 말을 두려워하지 않으시는군요.

아름다운 멜로디는 절대 치지하지 않거든요. 늘 당신을 초대하고, 늘 진짜죠. 제가 하고 싶은 건 제 세계를 당신과 나누는 것뿐이니까요. 한 친구가 저한테 이런 말을 했어요. “프레디, ‘fuck you’라고 말하는 게 ‘I love you’라고 말하는 것보다 쉬워.” 저는 늘 ‘I love you’의 편이고, 그래서 늘 더 많은 욕을 먹어요. 특히 미술계에서는 ‘fuck you’라는 말이 훨씬 잘 먹히죠. ‘I love you’라고 말하면 자기 카드를 다 보여주게 되니까 인기가 없어요. 물론 어려운 자리예요. 저는 늘 ‘과잉’의 경계에 서 있어요. 너무 치지해지기 직전이죠. 그런데 거기서 편안해지는 법을, 진실해지는 법을 배웠어요.

이번 전시의 제목 <The Nearest Faraway Place>는 비치 보이스의 곡 제목에서 따왔어요. 개인적으로 비치 보이스가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 중 하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동시에 가사를 까보면 그렇게 치지할 수가 없지요.

저에겐 다 아름다움이에요. 바흐와 비치 보이스는 연결돼 있다고 생각해요. 뭔가 신적인 것이 작동하고 있어요. 그들은 자기 에고를 위해 만든 게 아니라 자기보다 큰 무언가를 위해 만들었죠.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20대 때 비치 보이스의 ‘God Only Knows’를 수백 번 들으면서 몇 번이고 운 적이 있어요. 그 멜로디가 너무 아름다워서요.

(셔츠를 걷어 자신의 팔뚝을 보여주며) 그 노래를 너무 좋아해서 아예 제목을 제 팔뚝에 새겼을 정도예요. 그거 아세요? 그 노래가 제목에 ‘신’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최초의 팝송이라는 사실 말예요.

와우! 하긴 그렇겠네요.

그 노래에 대해 뮤지션들과 이야기해보면 재미있어요. 그 노래의 프레이징과 멜로디, 코드 프로그레션은 정말 말도 안 되게 복잡하대요. 프로 뮤지션도 한 번 듣고는 쉽게 그 곡의 악상을 떠올리지 못하죠. 그런데 멜로디는 너무 쉬워요. 정말 치지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순해 보이는 그 멜로디가 실은 극도로 복잡한 것이란 사실을 생각해요. 위대한 예술가는 그런 복잡한 아름다움조차 쉬워 보이게, 힘 안 들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죠. 패션처럼요. 제 그림도 그렇다고요? 어렵게 만들려고 하지는 않아요.

당신의 그림도 그렇죠. 전 당신의 석양 그림을 볼 때 브라이언 윌슨이 필 스펙터에게서 이어받은 ‘월 오브 사운드’가 떠올랐습니다.

맞아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는데, 맞는 것 같아요. 감정의 벽이죠.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당신은 단순히 실험을 하는 과학자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 자체를 두고 실험 중인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재미있네요. 제가 예전에 비슷한 말을 한 적 있어요. 자기 심장을 두고 실험을 하는 데 과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요.

작업을 볼 때 스스로 확신이 드시나요?

많은 작가가 그렇듯 저도 임포스터 신드롬이 있어요. 이건 제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제 생각의 연장일 뿐인데 여기에 예술이라는 게 있다는 게 잘 안 믿기죠. 불신과 의심이 늘 있어요. 스스로를 표현할 때는 자신 있다가도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보면 ‘세상에, 이 모든 게 창피하다’ 싶어요. 그런데 그런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회화가 답답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죠. 왜인가요?

이 세상에서 제 ‘일’은 아마 저를 표현하고 사람들을 건드리는 것 같아요. 소명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요. 저는 모두에게 믹스테이프를 만들어주는 사람이었거든요. 회화도 제게는 누군가를 위해 믹스테이프를 만드는 또 하나의 형식이 된 거예요. 제 세계를 나누는 데 집착하는 거죠. 노래나 영화나 책 안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 말이에요. 회화는 직업이에요. 그걸로 돈을 벌고 그걸로 살죠. 하지만 다른 것을 했을 수도 있어요. 실제로 곡도 썼고요.

당신은 리암 갤러거의 <C’mon You Know> 리드 싱글 ‘Everything’s Electric’의 가사를 썼지요. 푸 파이터스의 데이브 그롤과 함께요.

친구이자 프로듀서인 그렉 커스틴이 리암 갤러거와 함께 작업하는 사이였고, 제가 음악을 좋아하는 걸 아니까 가사를 써보겠냐고 제게 제안했어요.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제 그림에 쓴 문장들을 전부 적어봤지요. 그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문장들을 골라 건넸고, 그렇게 함께 곡을 완성했죠. 데이브 그롤은 그 곡의 드럼 비트를 만들어 작곡 크레디트에 들어갔고요. 영국 어딘가에서 리암이 그 노래를 처음 부르는 걸 봤을 때 거의 정신착란이 일어날 뻔했어요. 제 그림에 있는 문장들을 그가 노래하고 있는 거예요. 아주 사적인 문장들인데 리암은 그걸 모르죠. 소름이 돋았어요. 동베를린에서 온 소년이 쓴 문장이 어딘가로 흘러가서 이렇게 노래로 불리고 있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싶었죠. 그때 알았어요. 모든 게 연결돼 있고 모든 게 가능하구나. 열려 있기만 하면 흐르는구나. 아이러니한 건 늘 뮤지션이 되고 싶었던 제가, 화가가 되고 나니 제 음악 영웅에게 곡을 써줄 수 있었다는 점이에요.

페이스 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두 개 층으로 나뉘어 있어요. 어떻게 나뉘어 있는지 설명해주세요.

아래층의 드로잉은 내면적이고 아주 사적인 것들이에요. 종이의 연약함, 수채라는 재료, 그리고 이 작업들을 여기서 단번에 마무리했다는 사실 때문에 일기의 한 장 같다는 느낌이 있어요. 고통스러울 만큼 저에게 가까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죠. 위층의 회화는 바깥을 향한 충동을 더 많이 드러내는 작품들이에요. 지난 2년간의 방황을 바깥으로 투사한 것이죠. 여전히 사적이지만 더 열린 곳에 나와 있어요. 일기를 차에 싣고 시골로 가서 석양을 보며 우는 것 같은 거죠.

아래층에 있는 작품에 쓰여 있는 ‘I miss myself’ 같은 문장들이 언제 떠오르는지 기억나요?

제 머릿속엔 도서관이 있어요. 텍스트가 워낙 많이 쌓여 있거든요.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떤 느낌이 오고, 이어서 전기 충격 같은 게 올 때가 있어요. 이번엔 공항에서 곧장 갤러리로 와서 열여덟 개의 문장을 써야 했지요.(그는 페이스 갤러리 아래층에서 지금 전시된 수채화의 문장들을 작업했다.) 두세 개를 쓰고 나면 뭔가가 흐르기 시작해요. 그리고 제 안에서 반응이 오기를 기다리죠. ‘I miss myself’는 그렇게 나왔어요. 지난 2년 동안 저는 제 자신과 깊이 단절돼 있었어요. 스스로를 그리워한다는 건 절망적이면서 아름다운 방식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에요. 자기를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말자는 뜻이기도 하고요. 아주 정직한 진심에서 나온 문장이었어요. 이번 플레이리스트에 넣은 아서 러셀의 ‘A Little Lost’와도 통해요. ‘조금(a little)’이라는 말이 너무 정확해요. 조금인데 그 조금이 너무 크잖아요. 저는 지금 길을 조금 잃었어요. 완전히는 아니에요.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고, 작업도 할 수 있고, 저를 표현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조금 잃어버린 상태예요. 사실 우리 모두 그렇죠.

마지막으로 아무래도 논란이 있었던 직후의 인터뷰니까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의 한 사진작가가 제기한 문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노코멘트입니다. 대신 한 문장의 답변을 드릴 수 있어요. “사랑은 공짜니까, 그냥 나누세요.”(Love is free, give it away.)

Credit

  • EDITOR 박세회
  • PHOTOGRAPHER 김성룡
  • ART DESIGNER 주정화
  • PHOTO courtesy of PACE GALLERY and the artist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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