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는 부활할 수 있을까
마블과 DC로 양분되어 온 세계를 현실의 빌런들이 부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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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더는 히어로를 찾지 마시길 부탁드린다. 제발. 사실 오래전부터 말해왔다. 더는 마블과 DC 관련 주식에 투자하면 안 된다고 말이다. 사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난 십 년간 마블은 죽은 자식 불알만 만지고 살아왔다. DC는 죽은 자식도 없었다. 마블에서 제임스 건을 굳이 끄집어내 데려갔다. 이런 얕은 수가 통할 리가 없다. 마블의 전성기는 끝났다. 마블 전성기의 수는 더는 통하지 않는다. 제임스 건의 수는 잘 통했다. 그러나 그래 봐야 제임스 건의 수 역시 마블이 이미 성공한 뒤 꺾인 수다.
DC가 계속 흥행에서 고전하던 잭 스나이더를 내보내고 제임스 건을 들였을 때 나는 당황했다. 전혀 다른 수를 내놓을 줄 알았다. 경쟁사 이사를 데려올 줄은 몰랐다. 제임스 건은 슈퍼맨 신화를 다시 쓰겠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기가 너무 빨랐다. 헨리 카빌에도 아직 적응을 하지 못했는데 또 새로운 슈퍼맨이라고? 어쩔 도리가 없다. DC의 신화는 슈퍼맨과 배트맨이다. 배트맨은 이미 DC 다른 팀이 새로운 세계관으로 잘 만들어가고 있다. 결국 슈퍼맨의 신화를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다. 슈퍼맨을 새로 써야 DC를 새로 쓴다.
지난해 개봉한 <슈퍼맨>은 애매했다. 사람들 반응은 꽤 좋았다. 제임스 건 영화는 대부분 그렇다. 제임스 건이 완벽하게 실패하는 경우는 없다. 박스오피스가 따라가 주질 않았다. <슈퍼맨>은 DC와 워너브라더스가 기대했을 전 세계 10억 달러 기록을 세우지 못했다. 해외 시장에서 유독 인기가 없었던 탓이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향하자 뒷말이 많았다. 나는 실망했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제임스 건은 잔재미에 대단히 강한 연출자라 재미가 없을 수는 없다. 게다가 그는 잭 스나이더의 반대편으로 갔다. 그야말로 희망이 넘치는 슈퍼맨 영화였다.
문제는, 우리 모두 이미 희망이 넘치는 슈퍼맨들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 드라마로 수없이 반복된 슈퍼맨은 언제나 긍정적인 슈퍼히어로였다. 우리는 슈퍼맨을 또 보고 싶어 <슈퍼맨>을 보러 간 게 아니다. 마블의 제임스 건이 DC로 건너가 무슨 재주를 부릴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영화 외적인 궁금함이다. 그런 건 영화가 끝나는 순간 휘발된다. 슈퍼맨의 다음 이야기가 더는 궁금해지지 않는다. 이럴 때 중요한 건 차기작이다. 그 영화는 <슈퍼맨>의 애매한 성공을 세계관의 확장을 통해 더 폭발적으로 이어가야 했다.
<슈퍼걸>은 그럴 만한 영화가 아니다. <프라이트 나이트>(2011), <아이, 토냐>(2017), <크루엘라>(2021)를 만든 크레이그 길레스피의 연출은 자꾸 갈 지 자를 걷는다. 해야 할 게 많아서다. <슈퍼맨> 마지막 장면에 등장했던 슈퍼걸 캐릭터의 서사를 이야기해야 한다. 한 명이 파란 타이츠에 빨간 팬티를 입고 있는 것만 봐도 어색한데 둘이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야 할 영화적인 이유를 납득시켜야 한다. 제임스 건이 설계하고 있을 DC 유니버스 확장도 알려야 한다. 동시에 쿨한 현대의 젊은 여성이 주인공인 액션 영화라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슈퍼걸>은 그중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박스오피스에서 민망할 정도로 실패하면서 <슈퍼걸>은 마침내 DC의 죽은 자식이 됐다. 기사는 왔다 갔다 한다. 제임스 건이 여전히 뚝심 있게 DC 유니버스를 책임진다는 기사도 있다. 이미 워너브라더스에서는 제임스 건을 쫓아낼 궁리를 한다는 기사도 있다. 이런 상황에는 부정적인 기사를 믿는 게 확률이 좀 더 높다. <슈퍼맨>의 미지근한 성공과 <슈퍼걸>의 뜨거운 실패는 메시지다. 더는 슈퍼히어로 장르에 투자하지 말라는 메시지다.
박스오피스 전반적인 경향을 따지자면 거대 스튜디오 IP는 올해 계속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디즈니의 <만달로리안과 그로구>는 <스타워즈> 장편영화 역사상 최악의 흥행을 기록 중이다. 성공한 IP를 실사로 리메이크한 <모아나>도 박스오피스에서 타이타닉처럼 가라앉았다. 원래 통하던 수가 더는 통하지 않는다. <슈퍼걸>의 실패도 이게 다 원래 통하던 수라서다. 이젠 통하지 않는다. 스튜디오들만 그걸 모른다. 올해 미국과 한국 박스오피스는 소규모 호러영화들의 시대다. 미국은 <백룸>과 <옵세션>이, 한국은 <살목지>가 큰 영화들을 제쳤다. 내년쯤이면 스튜디오 대표들도 눈치를 채긴 할 것이다. 그 딱딱한 양반들 머릿속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집어넣는 데는 원래 한 1년 정도 걸린다.
자, 그렇다면 최후의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올여름엔 마블의 <어벤져스: 둠스데이>가 드디어 개봉한다. 마블은 지난 몇 년간 곡기를 끊고 스탠드얼론 영화나 시리즈 제작을 거의 멈췄다. 오로지 <어벤져스: 둠스데이>가 최후의 희망인 것처럼 굴었다. 최후의 희망인 건 맞다. 이게 실패하면 마블 유니버스는 붕괴한다. 이미 붕괴했으나 확실히 붕괴한다. 지난 이십여 년간 하나의 스튜디오를 먹여 살린 IP의 숨을 끊는 건 쉬운 결정은 아니다. 디즈니가 손대는 다른 것들이 잘되고 있는 판도 아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만 한다.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게 그나마 있는 돈을 유지하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걸 깨닫게 해야 한다.
슈퍼히어로 장르를 어떻게 만드느냐의 문제는 이미 끝났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키이우에 미사일을 날렸을 때 끝나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중동에 미사일을 날렸을 때 확실히 끝났다. 이젠 끝났다. 매일 뉴스는 전쟁을 보여준다. 세상 모든 곳이 전쟁이다. 과거의 우리는 영화적인 결말을 믿었다. 그래도 어딘가에는 히어로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를테면, 냉전 시기에는 러시아가 핵미사일을 날리면 정의의 편인 미국이 핵미사일로 응수할 거라는 아주 일차원적인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이 만든 그 많은 승리로 끝나는 전쟁영화와 액션영화 속 히어로들을 ‘더 나쁜 놈 패는 나쁜 놈’으로 즐겁게 소비해 온 것이다.
슈퍼히어로 장르가 절정이던 2000년대와 2010년대의 우리에게는 세계의 질서가 지금처럼 무너져 난동을 부릴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중동의 많은 내전이 있긴 했지만 세계 최강국들이 전쟁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내 땅을 함부로 빼앗아 가는 오랑캐 짓은 누구도 하지 않을 거라는 신뢰가 있었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그 질서와 신뢰가 눈앞에서 무너지는 꼴을 봐왔다. 세상에는 슈퍼히어로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됐다. 마블의 전성기가 끝나가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키이우에 미사일이 터지는데 아이언맨은 오지 않았다. 가자지구에 폭탄이 터지는데 토르는 없었다. 우리는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충분히 이해한다. 그 경계가 지나치게 깊어지는 순간, 영화를 그저 영화로서 즐길 수 있는 경계도 금이 간다. 현실에도 없는 히어로를 영화까지 계속 납득하며 즐길 수는 없다.
DC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동네 윗자리 차지하고 있는 양반들은 새 아이디어를 머릿속에 넣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들은 아마 마블의 <어벤져스: 둠스데이>가 어떤 둠스데이를 맞을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마블은 이미 떠나보낸 옛 성인들을 어떻게든 다시 불러내느라 아이언맨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게 최종 악당 닥터 둠 역을 맡겼다. 시나리오로 무슨 서커스를 벌였을지 짐작이 간다. 소용없는 서커스다. <어벤져스: 둠스데이>가 옛 히어로를 모조리 불러들이고, <판타스틱 4>와 <엑스맨>까지 어거지로 세계관을 이어 붙이고, 마블 바깥에서는 졸작만 양산하던 루소 형제까지 다시 데려온다고 이미 끝난 서커스에 관객이 돌아올 리가 없다. 돌아올 수도 있다. 이번 한 번이다. 이벤트는 두 번 가능하지 않다. 산업을 위해서라면 내 예측이 빗나가길 바라지만, 아니다. 이런 소리를 한 예측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
마블의 둠스데이 이벤트가 끝나면 DC도 둠스데이를 발표할 것이다. 이젠 정말 끝나야 한다. 끝내야 한다. 어떤 강력한 빌런을 데려와도 트럼프와 푸틴과 시진핑과 네타냐후라는 현실 빌런들을 이길 수는 없다. 히어로는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트럼프가 히어로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뭐 그런 사람도 있기는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세계의 질서가 마치 DC 유니버스가 마블에서 데려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디렉팅 하나로 바뀌는 것처럼 빠르게 전환하며 무너지는 꼴을 계속 보게 될 것이다. 새로운 유니버스가 열리고 있다. 현실에서 유니버스가 열리는 와중에 마블과 DC 유니버스 변화 따위에 관심을 가질 덕후는 더는 없다. 지난 20년, 우리는 참 편한 세계에 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짜 빌런과 그에 대항하는 가짜 히어로들을 만들어 가지고 논 것이다. 유년기는 끝났다. 슈퍼히어로는 유년기에 묻으라.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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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 박세회
- WRITER 김도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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