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를 넘어 서울까지 점령한 혼술바 탐방기
혼술바는 얼굴을 마주한 오픈 채팅방과 같다. 직업군인으로 일하다가 전역한 사람과 농수산물시장에서 도매 일을 하는 사람과 앱 디자이너와 와인 수입업자와 영어 강사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일은 혼술바가 아니었다면 꽤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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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원래 바는 누구나 혼술을 할 수 있는 곳이잖아.” 혼술바가 인기를 끌고 있으니 취재를 해보겠다고 했을 때 <에스콰이어> 디렉터가 했던 말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의 말이 옳다. ‘혼술바’라는 명칭은 ‘역전 앞’처럼 동어반복에 가깝다. 내가 아는 한 혼술을 금지하는 바는 없다. 이어서 그는 “아, 그럼 혼술바는 혼자서만 갈 수 있는 건가?”라고 되물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한 번도 혼술바에 가본 적이 없는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제가 한번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이쪽(홍대, 연남, 합정, 망원)에만 혼술바가 60개 정도 돼요. 저희 가게 옆도 한 군데 공사 중이더라고요.” 연남동에 위치한 혼술바 ‘고도’의 매니저 민혁 씨의 말이다. 평일 저녁이라 그런지 고도에는 남자 손님 4명이 전부였다. “연휴가 끝난 주 평일에는 사람이 적어요. 대신 주말에는 웨이팅이 생길 정도로 붐비고요. 손님들이랑 가볍게 대화하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도 제 역할이긴 한데, 지난주에는 술 만드느라 바빠서 그러지도 못했어요.” 민혁 씨가 고도의 시그너처 칵테일 ‘중도’를 내어주며 말했다. 고도에는 약 60가지의 칵테일 메뉴와 40여 개의 위스키 등 다양한 술이 준비되어 있다.
테이블 위에는 칵테일을 주문하면 함께 나오는 가벼운 주전부리와 어색한 대화를 풀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밸런스 게임 카드’가 놓여 있다. 혼술바는 서로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기다란 바 테이블을 놓는 것이 기본이며, 되도록 남녀가 교차로 앉도록 자리를 배정한다. 앞에 앉은 남자는 자신이 홍대에서 의류 편집숍을 운영하고 있다며 “처음 와봤는데 생각보다 분위기가 편해서 좋네요. 퇴근길에 가볍게 한잔 마시기 적당한 것 같아요”라고 대뜸 말했다. 내가 그에게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혼술바는 그런 곳이다.
주말에 다시 찾은 혼술바는 분위기가 꽤 다르다. 홍대처럼 번화가가 아니라 업무 단지와 주거시설이 몰려 있는 마곡지구에 위치한 곳이었는데도 그렇다. 토요일 밤 10시 무렵 입장했을 때 20석 남짓한 자리는 거의 만석이었다. 대부분의 혼술바는 밖에서 안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는 구조이기 때문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렇게 사람이 많았구나’ 하면서 흠칫 놀라는 경우가 많다. 다들 대화에 열중하다가도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슬쩍 쳐다보는 게 혼술바의 ‘국룰’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혼술바는 얼굴을 마주한 오픈 채팅방이다. 직업군인으로 일하다가 전역한 사람과 농수산물시장에서 도매 일을 하는 사람과 어플리케이션 UX 디자이너와 와인 수입업자와 영어 강사와 잡지 에디터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일은 혼술바가 아니었다면 꽤나 어려웠을 것이다. 다양한 사람이 모인 만큼 대화 주제도 각양각색이다. 사는 곳, 직업, MBTI, 취미 등 가벼운 스몰 토크만 주고받아도 1시간이 훌쩍 흐른다. 연령대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이 주를 이루지만 드물게 20대 초반과 30대 후반도 보인다.
“혼술바에서 친해진 언니랑 같이 왔어요. 말하는 걸 워낙 좋아하거든요. 여기 오면 평상시에 만나기 어려운 다양한 사람들과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재미있어요.” 메이크업을 전공한다는 2004년생 어느 대학생의 말이다. 그녀와 함께 온 언니는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1997년생 직장인이었다. “동네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에요. 혼술바에 오는 사람들은 주로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인 경우가 높거든요. 저는 퇴근 후에 가볍게 한잔 마시고 싶은데 친구를 부르기엔 애매한 상황일 때 여기에 와요.” 제주아홉 마곡나루점만 30번 넘게 방문했다는 93년생 남성의 말이다. 왜 그렇게 자주 왔냐고 묻자 “제가 사는 오피스텔이 바로 이 건물이라서요”라는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간혹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하거나 심심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스태프가 다가가 가볍게 말을 걸기도 하지만 부담스러운 수준은 아니다. 진행자가 나서서 끊임없이 프로그램이나 게임을 진행하는 솔로파티와 비교하면 혼술바는 잔잔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 가깝다. 맥주와 소주만 팔던 기존의 ‘헌팅술집’과 달리 칵테일, 와인, 싱글 몰트 위스키, 리큐어 등 선택 가능한 주종이 다채롭다.
전반적으로 캐주얼한 분위기인 혼술바지만, 연애 대상을 찾는 게 목표라면 이야기가 180도 달라진다. 도와주는 사람이나 장치 없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하는 구조라서 그렇다. 불특정 다수와 원만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자신이 마음에 드는 특정 인물에게 은근히 플러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깝게 앉은 바 테이블에서 대놓고 번호나 인스타그램을 물어보려면 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게다가 혼술바는 헌팅술집과 달리 상대방이 연락처 교환을 거부했을 때 “재밌게 노세요”라며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갈 수도 없다. 굳이 만남을 이어가고 싶다면 주위에 앉은 사람들 모두의 인스타그램을 물어보거나, 흡연하는 척 밖으로 나가 상대방이 따라 나오길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다.
혼술바는 제주도에서 먼저 인기를 끈 후 육지로 전파된 케이스다. 비슷한 시기에 제주도에서 서울로 넘어온 혼술바 브랜드가 여럿 존재하는데, 현재 제주아홉의 규모가 제일 크다. 1년 만에 전국에 약 50개의 체인점을 냈으니 말이다.
“의외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저희는 혼술바가 이성을 만나기 위한 장소로만 비쳐지는 걸 경계하고 있어요. 애당초 저희가 혼술바를 시작한 취지랑 다르거든요.” ‘나인홀딩스’의 현성민 이사의 말이다. 그는 제주도 금능에서 제주아홉 1호점을 오픈한 인물이다. “금능리가 제주도에서도 꽤 시골이라 밤이면 여행객들이 딱히 할 게 없었어요. 그래서 의자 9개 놓고 심심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소통이라도 해보자는 취지에서 혼술바를 연 거죠.” 이를 증명하듯 제주아홉의 인스타그램에는 ‘이곳은 헌팅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 아니며, 남녀 성비를 맞추는 곳도 아닙니다’라고 적혀 있다.
혼술바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혼술바에 오는 이유를 묻고 다녔을 때 들은 대답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다들 외로워서 그런 것 아닐까요? 여기선 이름이나 나이를 밝히지 않고도 얼마든지 대화를 할 수 있으니까요. 어떤 면에선 친구를 만날 때보다 더 자유롭게 이야기를 할 수 있죠. 혼자 넷플릭스를 보며 술을 마시는 건 이제 좀 지겨워요.” →
Credit
- PHOTO 페어링 스튜디오/솔로 하우스/제주 아홉
-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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