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미국 도시 특집 Pt1. 다시 돌아온 라스 베가스 영광의 시간

인류가 만든 가장 화려한 도시 라스베이거스로 사람들이 다시 몰려들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화려함을 좇는 관광객만은 아니다.

프로필 by 박세회 2024.12.29

우리의 마음속엔 미디어가 주입한 도시의 심상이 있다. <애틀랜타>를 본 사람이라면 그 도시의 모든 흑인이 힙합 뮤지션이거나 힙합 뮤지션의 친척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8 마일>을 본 에미넴의 팬이라면 디트로이트 다운 타운에 발만 디뎌도 총을 맞을 수 있다며 두려워할 것이다. 유튜브로 샌프란시스코 랜선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범죄 소굴이 되었다고 여길 테고, 라스베이거스가 여러 영화에서 다뤄진 방식을 생각하면, 그곳이 지난 20년 사이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거주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도시 중 하나라는 사실을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에스콰이어 코리아>는 다음 미국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기 직전, 우리가 그동안 발견한 미국의 다섯 도시의 조금 다른 실상을 기록하기로 했다.


LAS VEGAS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장 상징적인 공간은 아마도 도심을 가로지르는 대로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의 한복판, 벨라지오 호텔의 인공호수에서 뿜어내는 분수쇼가 보이고, 패리스 호텔의 미니어처 에펠타워가 눈에 들어오는 바로 그 공간일 것이다. 그곳의 광경은 인터넷이 연결된 세상에 살고 있다면 모두가 공유하는 (어른들의) ‘모험과 신비가 가득한 나라’의 상징이다. 내셔널 풋볼 리그(NFL) 소속 ‘라스베이거스 레이더스’의 홈구장 얼리전트 스타디움은 그곳에서 불과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마음만 먹으면 패리스 호텔의 정문에서 10분 내로 주파하는 게 가능한 거리다. 스타디움이 도시의 제1도심에서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경우는 좀처럼 본 적이 없다. 우리가 그날 얼리전트 스타디움의 ‘스타디움 투어’에 간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경기는 없지만,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구경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스타디움만 보는 게 재밌을까? 나의 오판이었다. 불과 30분이 지난 후 나는 ‘고 레이더스’를 외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얼리전트 스타디움은 그냥 잠실구장 같은 곳이 아니었다. 건설비용만 자그마치 19억 달러(2조7111억원)가 들어간 이 구장은 현재가치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싼 스타디움이다. “비밀 하나를 말해주죠. 경기가 있는 날 우리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뭔지 알아요? 바로 화장실입니다.” 스타디움 투어를 가이드하던 남자(우리에게 ‘고 레이더스’를 외치도록 시킨 남자)가 말했다. “이 스타디움에는 297개의 화장실이 있고, 1430개의 좌변기 및 소변기가 있습니다. 이것들이 막히면 정말 큰일이 나겠죠. 그래서 경기가 있는 날이면 전부 잘 작동하는지 테스트를 한답니다.” 그가 말했다. 1430개의 변기에서 그 규모는 눈치챘겠지만, 그 화려함을 짐작할 순 없을 것이다. 얼리전트 스타디움의 팬 라운지의 규모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카타르 공항의 VIP 라운지를 방불케 했다. 38개의 레스토랑이 각 섹션 앞에 자리 잡고 있고, VIP 라운지에서는 뷔페식과 음료 그리고 술이 무제한 제공된다. 이러한 백라운지 시스템(좌석 뒤쪽으로 경기 중간중간 식음료를 제공하는 라운지가 마련되어 있는 시스템)이 처음은 아니다. 해외의 거의 모든 최신 스타디움들은 이런 시설을 갖추고 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경기가 끝난 후 근처에서 열리는 테일게이트 파티(경기가 끝난 후 자동 트렁크를 열고 가져온 음식들을 꺼내 나눠 먹는 파티)에 참석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종합 도파민 파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날 우리 일행은 심지어 미식축구 경기가 열리는 필드로 내려가 슈나우저처럼 뛰어다녔는데,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경기가 없는 날엔 가짜 잔디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버뮤다 잔디’(미식축구 잔디 중 최고로 친다)가 깔린 진짜 잔디 구장은 바깥으로 빼서 따로 관리한다고 설명하며 투어 가이드가 한 손을 들어 경기장 바깥쪽으론 난 거대한 문을 가리켰다. 살짝(그러나 한 20m쯤) 열린 문틈 사이로 폭 68m 길이 100m의 잔디 필드가 마치 시루떡처럼 스타디움 밖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 구장의 위용은 중요하다. 건립 비용 중 약 3분의 1이 넘는 7억5000만 달러(1조699억원)를 세금으로 부담했기 때문이다. 1조원이 넘는 퍼블릭 펀드가 ‘라스베이거스를 위한 장기적 경기 부양의 수단’이라는 주장이 공감을 얻었다. 어떻게 경기를 부양하냐고? 그날 내가 만난 제프 레예스 씨가 좋은 예다. 사실 ‘라스베이거스 레이더스’는 1995녀부터 2019년까지 그리고 또 그전인 1960년부터 1981년까지 연고지가 샌프란시스코 바로 옆 오클랜드인 ‘오클랜드 레이더스’였다. 새너제이에서 성장한 제프 씨는 인근에 연고지를 둔 두 개의 구단,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49ers)’와 오클랜드 레이더스 중 후자를 선택했다. 그런 오클랜드 레이더스가 연고지를 라스베이거스로 옮겼다. 그런데 그렇다고 제프 씨가 가까운 곳에 있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를 응원할 수 있을까? 지금 마흔두 살인 제프 씨에게 포티나이너스는 사춘기부터 30대까지의 거의 모든 레이더스와 산파블로만의 패권을 두고 ‘베이 더비’(derby)를 벌이던 앙숙이었다. 그러니 샌프란시스코 리바이스 스타디움의 포티나이너스를 응원할 순 없는 노릇이다. LG트윈스가 갑자기 홈구장을 평택쯤으로 옮긴다고 해도 잠실이 가깝다는 이유로 두산 팬이 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제프는 먼 곳에서 라스베이거스 레이더스를 응원하며 종종 시간이 날 때면 비행기를 타거나 오랜 시간을 운전해 라스베이거스에 오기로 결심했다. 비행기를 타고, 공항을 이용하고, 호텔에 숙박하고, 식음료를 사 먹는 모든 비용이 라스베이거스의 경기를 부양한다. 그런데 레이더스는 왜 라스베이거스로 연고지를 옮겼을까? 구단이 연고지를 옮겼을 때는 반드시 시사하는 바가 있다. 라스베이거스로 옮겨오는 팀이 레이더스뿐만이 아니라는 점이 더욱 흥미롭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역시 수년 안에 라스베이거스로 옮겨올 겁니다. 이전이 확정됐어요. 이유야 뻔하죠. 코로나 팬데믹 이후 범죄가 너무 많아져서 구단 관계자들과 선수들이 이전의 필요성을 느낀 거죠.” 투어 가이드가 말했다. 샌프란시스코만 ‘베이 에어리어’ 동쪽에 면한 오클랜드는 샌프란시스코 광역권의 인구를 끌어모으기에 가장 적합한 위치에 있어 여러 구단들이 연고지로 삼았으나, 더는 치솟는 범죄 탓에 살 수 없는 도시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주 바로 옆에 있는 네바다의 라스베이거스가 그 해답으로 등장했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라스베이거스의 성장을 돕고 있는 것 같아요. 2020년에 레이더스가 오클랜드에서 옮겨왔고, 2023년부터는 시내에서 라스베이거스 그랑프리가 열리죠. 이제 곧 야구 구단까지 옮겨온다니 어쩌면 미국 최대의 스포츠 도시가 될 거예요.” 투어 가이드가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스포츠 팀만 라스베이거스로 옮겨오는 것은 아니다. 알리언츠 스타디움에서 다음 날 우리는 핑크색 밴을 타고 ‘불의 계곡’(Valley of Fire)으로 떠났다. 핑크 어드벤처 투어스는 꽤나 거대한 업체다. 그랜드캐니언, 세도나, 스모키 마운틴 등 네바다와 애리조나 인근의 관광지에선 핑크색 지프나 오프로드 밴을 만나지 않는 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다. 그날 우리의 가이드는 도널드 리치(Donald Ritchie)라는 이름의 아저씨였는데, 그는 라스베이거스 시내에서 불의 계곡까지 가는 1시간 30여 분 동안 8인승 밴 안에 설치된 마이크 시스템으로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수다를 이어갔다. 그의 수다 중엔 꽤나 재밌는 구석이 많았는데, 흥미로운 건 라스베이거스가 지난 20년 동안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도시 중 하나였다는 점이었다. 라스베이거스 광역도시 기준으로 2000년에 130만 명이었던 인구가 지금은 230만을 넘어섰다. 대부분의 광역도시들이 치솟는 물가와 주택 비용 탓에 점차 인구가 유출되는 반면 라스베이거스는 2023년에서 2026년 사이에 2.3%의 인구가 늘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라스베이거스가 다른 광역도시에 비해 도심은 안전하고, 일자리는 넘쳐난다. 관광객들이 국내외에서 쏟아지는 탓에 지역 경제가 탄탄하고, 세율도 좋은 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도심 인근에 국제공항도 있고, 스타디움도 있고, 쇼핑 센터도 있고, 온갖 메트로폴리탄의 편의를 즐길 수 있으면서, 주택 가격이 아직 낮다는 점이 주요하다. 또한 이는 라스베이거스의 주택가격이 미친 듯이 상승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는 라스베이거스에 2000년대 초반에 이사 왔어요. 그때 산 제 집 가격이 지금은 두 배를 넘어요. 거의 세 배 가까이 되죠. 부동산에서 맨날 전화가 와요. 집 좀 팔라고요.” 도널드 아저씨가 말했다. “어쩌면 집을 팔고 다른 도시의 좀 더 저렴한 주택에서 남은 돈을 쓰면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하죠. 사실 이 도시로 옮겨오는 사람들도 다 그런 마음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온 사람들이에요.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에 살다가 집값이 너무 오르니까 점점 바깥으로 밀려난 거죠. 그러다 결국 새로운 삶을 찾아 네바다로 건너온 거고요. 하지만 전 아직 집을 팔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도널드 아저씨가 말했다. 불의 계곡으로 가는 고속도로 동쪽엔 엄청나게 광대한 태양광 패널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호남선을 타고 가다 만난 평야처럼, 시야 왼쪽에서 오른쪽 끝까지 사막을 가로지르는 전신주와 그 전신주에 메달린 송전선으로 전기를 보내는 패널 평야를 보면서, 라스 베이거스가 세워진 땅의 척박함, 소출할 수 있는 것이라곤 햇빛으로 만든 전기밖에 없는 땅에 대해 생각했다. 1905년 두 개의 철도가 교차하던 곳에 세워진 작은 마을이 이 도시의 시작이다. 사실상 마을이었던 이곳에 카지노가 처음 생긴 것이 1931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도시의 역사에서 도널드 리치 씨가 살고 있는 지금은 아마 또 다른 긴 황금기의 시작일 것이다.


3 MUST-SEE PLACES

Sphere
‘스피어’를 영상 상영관이라고 말하는 것은 스피어가 품고 있는 ‘이머시브 디스플레이 플레인’이라는 플랫폼을 너무 축소하는 것이다. 시야가 가닿은 모든 곳을 거대한 구체의 영상이 감싸 안으면, 당신은 정말 어느 곳에나 갈 수 있다.

Disco Show
‘O 쇼’의 시대가 이제 지났는지도 모른다. 드래그 퀸과 게이 아빠가 등장해 흑인 인권운동과 LGBTQ 무브먼트의 역사를 시대별 디스코의 변천에 녹여 넣은 ‘디스코 쇼’는 라스베이거스의 인클루시비티와 가장 잘 어울리는 엔터테인먼트 공연이다.

Allegiant Stadium
당신이 지금까지 본 모든 스타디움은 잊어도 좋다. 경기를 하지 않는 경기장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거대한 기념비이며 거대한 건축물인지, 그 안에 들어가 그 속을 샅샅이 돌아다니는 느낌이 어떤지를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투어에 들인 비용의 값어치가 충분하다.

Credit

  •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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