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가 옷장을 열었을 때, 살바도르 달리와 엘사 스키아파렐리 편
녹아내리는 시계가 드레스 위에 걸리고, 서랍이 열린 인체가 재킷의 주머니가 되던 순간. 1930년대 파리에서 두 명의 이단아가 손을 맞잡았습니다. 한 명은 캔버스 앞에 섰고, 다른 한 명은 마네킹 앞에 섰죠.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전혀 다른 상상을 현실로 빚어낸 그들만의 세계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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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단아들의 만남: 1930년대 파리, 관습에 저항하던 디자이너 스키아파렐리와 화가 달리가 만나 예술과 패션의 경계를 허무는 파격적인 협업을 시작했습니다
- 무의식의 현실화: 달리의 회화적 상징인 랍스터, 서랍, 찢긴 살점 등을 의복에 이식하며 '입을 수 있는 도발'이자 '하나의 선언'으로서의 패션을 창조했습니다.
- 불멸의 레거시: 2차 세계대전으로 하우스는 문을 닫았으나, 이들의 해체적 실험은 맥퀸, 마르지엘라 등 현대 디자이너들에게 이어져 패션의 예술적 지평을 넓혔습니다
- 질문하는 패션: 단순히 옷을 입는 행위를 넘어 "왜 입는가,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지며 오늘날 런웨이 위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질문을 남겼습니다.
로마의 반항아, 카탈루냐의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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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 스키아 파렐리와 살바도르 달리 / 이미지 출처: Courtesy of Fundació Gala-Salvador Dalí
1890년 이탈리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엘사 스키아파렐리. 22살에 관능적인 시집을 출판해 집안을 발칵 뒤집었고 실패한 결혼 끝에 홀로 딸을 데리고 파리로 향합니다. 1927년 문을 연 그녀의 아틀리에는 코코 샤넬의 우아한 미니멀리즘과 정면으로 충돌했죠. 샤넬이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시켰다면 스키아파렐리는 여성의 몸 위에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옷은 아름답기만 해야 하는가? 왜 불편하면 안 되는가? 이 거침없는 행보에 발을 맞춘 인물이 또 있습니다. 바로 1904년 스페인 피게레스에서 태어난 살바도르 달리. 그 역시 평벙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죠.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에서 쫓겨났고, 초현실주의 그룹에서도 축출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천재라 부르는 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죠. 뻣뻣하게 치켜세운 콧수염, 광기 어린 눈동자, 녹아내리는 시계와 불타는 기린 등 달리의 캔버스는 독보적인 세계를 보여줬죠.
방돔 광장에서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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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돔 광장에 있던 부티크에서 엘사 스키아 파렐리 / 이미지 출처: Schiaparelli Archives
두 사람의 궤도가 겹쳐진 것은 1930년대 중반 파리입니다. 앙드레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하고 이성의 독재에 반기를 든 시대에 스키아파렐리의 방돔 광장 부티크는 교차로 역할을 했죠. 이 곳에는 만 레이가 드나들었고, 장 콕토가 스케치를 남겼으며, 마르셀 뒤샹이 아이디어를 흘렸습니다. 스키아파렐리는 화가들에게 직물 위에 그림을 그려달라 요청했고 조각가들에게는 단추를 의뢰했죠. 달리는 처음부터 패션에 관심이 있던 건 아닙니다. 예술의 순수성을 믿었고, 상업적 협업은 일종의 타협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스키아파렐리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달리의 그림을 볼 때 캔버스가 아니라 옷걸이를 봤죠. <서랍이 달린 밀로의 비너스>에서 재킷을 읽어냈고, 해변에 널브러진 연체동물에서 이브닝 가운을 상상했습니다.
랍스터, 서랍, 눈물의 삼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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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스터 드레스를 입은 윈저 공작부인, 월리스 심프슨 / 이미지 출처: Schiaparelli Archives
1937년 두 예술가의 콜라보레이션이 등장했습니다. 랍스터 드레스는 순백 오간자 실크 위에 거대한 붉은 바닷가재가 버티고 선 디자인입니다. 달리에게 랍스터는 성적 상징이자 무의식적 욕망의 메타포였지만, 스키아파렐리는 그것을 입을 수 있는 도발로 전환시켰습니다. 윈저 공작 부인 월리스 심프슨이 이 드레스를 입고 《보그》에 실렸을 때, 패션계는 경악했고 동시에 매혹됐죠. 옷이 단순한 껍데기가 아니라 하나의 선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으니까요. 같은 해 탄생한 데스크 수트는 재킷에 실제로 열리는 서랍을 부착한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이었습니다. 달리의 회화 속 서랍 달린 인체가 걸어 다니는 옷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했죠.
또한 티어 드레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달리가 디자인한 프린트에는 찢어진 살점 같은 환영과 눈물 자국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옷 위에 상처를 입힌다는 발상은 아름다움과 고통, 유혹과 불안이 한 벌의 가운 안에서 공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스키아파렐리는 이 드레스를 자신의 시그니처 컬러인 쇼킹 핑크와 결합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레거시 창의적이었던 두 아티스트의 협업은 1930년대 말 정점을 찍고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흩어졌습니다. 스키아파렐리는 뉴욕으로, 달리 역시 미국 망명길에 올랐죠. 전후 패션계는 크리스찬 디올의 뉴룩이 지배했고 초현실주의적 유희는 한동안 지하로 잠적했습니다. 결국 스키아파렐리는 1954년 하우스의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이 뿌린 씨앗은 죽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더 맥퀸의 잔혹한 서사, 마르틴 마르지엘라의 해체적 실험, 라프 시몬스가 디올에서 시도한 예술과 패션의 교차 등은 모두 스키아파렐리와 달리가 열어놓은 문을 통과한 것들이죠. 2022년 다니엘 로즈베리가 스키아파렐리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부임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꺼낸 건 달리 협업 아카이브였습니다. 황금빛 폐 모양 흉갑, 발가락이 달린 부츠, 사자 머리 장식 등 로즈베리의 컬렉션 속에서 1930년대 파리가 되살아났습니다. 예술이 패션에 건넨 건 프린트나 실루엣이 아닙니다. 질문하는 법이죠. 왜 입는가, 무엇을 말하는가, 불편해도 되는가. 달리와 스키아파렐리는 그 질문에 몸으로 대답을 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아직도 런웨이 위에서 걸어 다니고 있죠.
Credit
- EDITOR 한유주
- PHOTO 각 이미지 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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